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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도가 갈망하는 설교.1

힘찬 발걸음 2012. 11. 10. 09:16

예수가좋다오

성도가 갈망하는 설교.1 

글 : 안토니우스
    

  1. 융단 폭격 설교 

 

 설교자의 설교가 시작됐다. 그리고 설교는 끝났는데 정작 성도들의 머리에 남은 그날 말씀은 하나도 없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대지만도 10개가 넘고 소지도 5-6개가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설교를 얼마나 많이 준비해서 저렇게 말이 많은가 생각도 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설교준비가 부실하고 집중성과 논리성이 없기 때문에 대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한 것이다. 일년52주에 걸쳐서 해야 할 설교를 단 한주에 말하는 설교자는 누구인가?  바로 준비하지 않은 설교자이다.

 

 설교자들은 늘어놓는데 익숙해 있다. 하나님도 10개 정도면(십계명) 할 말씀을 다하셨다. 정하고 싶은 말이 많으면 따로 떼어서 하나로 하고 그 속에 앞으로 써야 할 말이 많으면 따로 떼어서 다음시간에 설교해야 한다. 만약 이 글 속에 대지를 하나로 하고 그 속에 앞으로 써야 할 말을 한번에 다 넣는다면 이 책을 읽다가 아마 던져버릴 것이다. 짜장면을 먹을 때는 짜장면맛만 알면 된다. 대지가 많아 외우는데도 뻘뻘 땀을 흘리는 성도들에게 지나간 대지의 내용을 질문했는데 대답 못한다고 다시 한번 미사일이 발사된다. 그날의 설교에 하나님의 한 가지 마음만을 전해보라.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라도 화폭을 두개 놓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그림을 그릴 수는 없는 것이다.


 

   2. 성도들이 느끼는 설교의 최대 문제점

 

  미국의 한 목회연구소에서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는데 의외에 대답이 나왔다. 그것은 “분석은 많은데 답변이 적습니다.” “지나치게 비인격적이고 지나치게 명제적입니다. 설교는 나의 삶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 답변은  성도들의 답답함의 실체가 모두 들어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설교들이 분석에는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정작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에는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설교자를 너무 허무하게 하는 설교를 들은 성도가“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라고 한다면 얼마나 허무하게 하는 반응인가? “설교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을 먹이는 것이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다.” 하고 한 신학자는 말했다.

 

 그러나 때로 성도들은 신학적인 설교와는 상관없이 그들이 원하는 것 즉, 죽음, 사랑, 삶, 직업. 등등에 문제를 놓고 명쾌한 답변을 원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마틴로이드 존스는 “주일날 설교하는 주요이유가 설교한다고 미리 알려졌기 때문인 정도까지 이른다면 설교자에게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라고 했다. 비인격적이라는 말, 다시말하면 직업적이라는 말로 표현 될 수 있을 것이다. 성도들은 그 만큼 사무적이고 일률적이며 습관적인 목회자로부터 직업적인 설교를 들어왔던 것이다. 또한 많은 설교자들이 지나치게 명제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숙제를 받으러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 된다. 바운즈는 “죽이는 설교는 문자다.”하고 말했다. 설교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하나님의 거룩성에 붙들어 매는 것이 설교다.


 

 3. 'About'에 익숙한 설교

 

 성도들이 싫어하는 설교 중 하나는 설교를 설명하는 설교를 굉장히 싫어한다. ‘~에 대하여’(About)를 설교하기에 익숙한 설교자들은 그만 자기 설교조차도 그 범주에 집어넣고 만다. “이 설교를 들어야 하는 이유”, “왜 이설교가 필요한가”, “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힘들었던 점” 등등 이러한 설교는 선포는 없고 언제나 설명만하는 설교가 된다. 이러한 설교를 듣게 되면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답답한 국면으로 접어들게 돼있는 것이다.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데 ‘복음에 대해서’ 만 설교를 하는 것과, “주 예수를 믿으라, 구원 받으라” 고 해야 할 것을 “구원받는 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라고 한다던지 “이 쪽 길이 대전 가는 길입니다.” 말하면 될 것을 “이 쪽이 아니고 저쪽이 아니고 ”만 반복하며 사람을 답답하게 한다.

 

여기에 관한 리처드 리스처의 글을 빌자면 “그리스도의 은혜는 전하지 않고, 단지 기독교, 은총, 복음, 그리고 기독교적 생활방식에 관해 설교하는 것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참 된 설교는 복음에 관한 강연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포시이드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을 주실 그리스도만을 설교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4. 성경만 얘기하는, 그리고 성경을 얘기하지 않는 두 가지 괴로움

 

 극동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를 듣다가 등장하는 인물의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줄잡아 10명이 넘을 것 같은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와 명언을 곁들여 목청에 힘을 주어 설교를 하고 있는 설교자를 만날 수 있었다. 성경이야기를 양념으로 할 뿐 주재료가 명언이나 격언, 유명인물들의 일화라면 앞뒤가 바뀐 것이다. 성도들은 목회자들만큼 설교에 대해 분석적이지는 않다. 그렇지만 본능적이요, 직관적이다. 분명한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다른 곳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설교자를 ‘말쟁이’로 여기고 싶다. 그리고 “여보시오! 설교 꾼 양반” 이라 부른다 해도 설교의 영광과 위엄에 비하면 이 말도 부드러운 말이라 생각된다.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을 인용하고 성경의 뜻을 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는 개념이다. 설교 도중에 몇 개의 성경인용구를 넣었느냐가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판별해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 사상이 정확히 성경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느냐하는 점이다. 결국 강조하는 것은 성경에 의해서 권위와 정보를 얻지 못하는 성경이 보증하지 못하는 “명언 메들리” 는 설교라는 테두리에서 밀려나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 되는 설교는 성경에 대한 깊은 묵상이나 적용 없이 마구 성경구절만 쏘아 붙이는 설교다. 성경봉독만 해도 1시간은 거뜬히 넘긴다. 성경구절도 찾고, 성경도 많이 읽었는데 정작 깨달음은 없다는 것이 이런 설교의 희생자들이 고백하는 한결 같은 외침이다. 


5. 말 많은 말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은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다. 말 한마디로 용기를 주며 말 한마디로 해답을 줄 수 있다. 말은 약이 되며 은혜의 전달자가 된다. 하지만 잘못 사용되는 말은 엄청난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한다. 설교자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 말은 단순한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가 전하는 것은 로고스이다. 설교자들이 품고 있는 말은 흘러가는 말이 아니라 뚫고 지나가야 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천박하고 경박한 말들을 대할 때 청중들은 슬퍼하고 분노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전하는 가장 거룩한 시간에, 가장 더럽고 값어치 없는 단어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꾸미고 예수님의 사역을 장식한다면 이처럼 욕된 일도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제럴드 케네디는“ 비록 통속어를 쓰는 교중이라 할지라도 지기들의 목사가 강단에서 저속한 말을 사용할 때에는 크게 분개한다는 것을 설교자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T.V에 앵커들과 같이 표준어를 사용해야 한다. 속어라든지,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저속한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것도 선포자가 고쳐야할 언어습관이다. 표준어를 구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세기 안디옥의 교부 크리소스톰은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아름답고 정확한 언어로 설교의 왕좌를 차지했다고 한다. 황금도 아닌 고철의 입이 되는 현실이 지금 강단의 현실이다. 설교자는 정확한 표현으로 상투적이지 않은 표현으로 통렬하게 가슴을 찌르고 영혼을 진동시킬 단어를 찾아야 한다.


 6. 내 심장은 3천rpm

 

 사회자의 소개에 이어 강단으로 나간다. 30초 후면 성도들이 설교에 몰입될 것인지, 귀를 닫아 버릴 것인지 확실하게 판가름 나는 긴장의 순간이다. 강단으로 나가기 전의 시간, 바로 그 시간에 내 심장의 바늘은 3천rpm을 가리킨다. 평소보다 훨씬 빨라진 맥박을 느낄 수 있다. 설교는 이와 같이 우리에게 긴장감을 야기하며 또 요구하고 있다. 강단에 서는 사람이 집 앞 골목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하듯 편한 대로 말을 한다면 이것은 큰 병의 징후일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정신이 풀어진 설교는 차라리 듣지 않는 것이 좋다.

 

주일 낮 설교는 경직된 상태로 음조를 높여가며 설교하지만, 오후 설교나 삼일 밤 설교나 심방설교에서는 너무 편한 대로 얘기한다. 오전에는 대통령 앞에서 설교한 것 같고, 오후에는 집안 식구들한테 설교하는 것 같다. 설교자는 언제나 정중하며, 언제나 경건하며,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내용에서뿐 아니라 어조를 통해서도 보여 주어야 한다. 성도들은 아무 호소도 없고 열정도 없는 설교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호소함이 있어야 한다. 음성으로, 자세로 호소함이 있어야 한다. 설교 전에 잡다한 일에 정신을 쏟는다거나 사람들과 잡담을 하다 강단에 올라간다면 그날의 설교는 언제나 실패한다. 오직 기도하며 마음을 정리하며 그날에 쏟아 부어 주실 주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사람들은 긴장이 없는 설교, 호소함이 없는 설교는 쉽게 ‘잔소리’로 분류한다.


 

  7. 바이블 코드

 

 한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이런 내용을 발견했다. “내양을 먹이라”를 해석하는 목사님이 양을 분석하며, 첫 번째 말할 때 주님이 말씀하신 양은 “바쳐진 양”, 두 번째는 “보통 볼 수 있는 양”, 이런 식으로 나누며 대단한 의미로 발전시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설교자들이 범하기 쉬운 일중에 하나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독’하려고 시도한다. 전혀 새로운 해독을 발견해 내곤 자랑스러워 빨리 설교하고 싶어 한다. 설교자들은 때로 평이한 본문을 특이하게 접근해 보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언어를 분해해서 그 분해 된 조각을 잡고 정의를 내리는 일은 수월할 뿐만 아니라 재미도 있다. 그리고 남들이 시도해 보지 않았다는 데서 스스로 탁월함을 느끼기도 한다.

 

언어란 보통의 일상적인 뜻을 따라야 한다. 당시에 쓰이던 일상적인 의미와 도구로서의 단어가 해석되어야지, 단어를 찢어서 해부하는 것으로 희열을 느껴서는 안 된다. 다이내믹한 뜻을 찾아 전하기도 해야 하지만 모든 설교가 해독으로 가서는 안 된다. 바운즈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을 죽이는 설교도 통찰력을 가질 수 있고 원리를 지닐 수 있다.

 

그것은 학술적일 수고 있고 의미상 비평적일 수도 있다. 또한 자자의 문법과 원어를 상세히 캐낼 수도 있다. 또한 그런 설교는 문자를 완전한 형태로 가지런히 할 수 있고, 플라톤이나 시세로처럼 각광을 일으킬 수도 있고, 변호사가 소송 안을 작성하기 위해, 또는 그 사건을 변호하기 위해 자기 교파를 연구하는 것처럼 연구할 수고 있겠으나 결국은 죽이는 결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 중심 사상이 나오게 되어 있다.


 

8. 이 사람이 우리에게 설교하기에 합당한가?

 

 이 질문에 많은 성도들이 이미 "NO"하였고 그 이유로 괴로움에 싸여서 고민하고 있는 성도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설교를 하는 단순한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설교 하는가’ 가 더 중요하다. 합당하지 못한 설교자 일 때 성도는 “변화 받는 설교”가 아니라 “들어 줘야 하는 설교”가 되는 것이다. “ 이 사람이 우리에게 설교하기에 합당한가?”라고 물을 때 성도들은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다.

 

첫째, 도덕적으로 자격이 있는가? 이다. 지저분한 손으로 떡을 집어주는데 그 떡을 먹을 사람은 없다.

문자적, 신학적 기준에 의해 갖추어진 설교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누가 설교하는가! 가 중요한 것이다.

 

둘째, 정말 우리를 사랑하고 있나요? “나는 더 많은 설교를 할수록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 전에 나의 태도에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두 가지-나 자신과 인간성-에 관한 나의 태도를 포착하는 것이다.” 라고 팀 티몬스는 말했다. 성도들은 설교자의 태도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안다. 관심인지 관심인 척하는 것인가를 말이다.

 

셋째, 당신의 말은 말이 되는가? ‘당신이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압니까’  라는 말이다. 윤리적, 감정적으로만 호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 논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말이 말이 되지 않는’ 설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신학의 부재요, 체험의 부재요, 열정의 부재요, 지성의 부재 때문이다. 요점정리 후 소감: 아직 멀게 만 느껴진다. 설교자로서의 자질 말이다. 그런 것 같다. 목회는 내가 하지만 나를 관찰할 수 있게 성도를 붙여 주신 것 같다. 신학적, 도덕적, 윤리적, 지적, 인간성, 인격, 등등 모든 부분에서 완벽하게 갖추어야만 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마져 든다.


 

   9. 파리 몸에 붙은 독수리 날개

 

  마틴 로이드 존스는 말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이미 설교자가 아닌 사람이라면 결단코 그를 설교자가 되도록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세상에는 가르쳐서 되는 일이 있고 가르쳐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 설교는 후자에 속한다. 계급적인 말도, 비하의  말도 아니라 부름 받은 자의 자리가 다르다는 것뿐이다.

 

설교학은 과학을 중심적으로 한 학을 전달한다. 그러나 이 과학적 과정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 다만, 과학은 영감 있는 설교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것과 같다. 하지만 영감 없는 설교에 단순한 과학은 파리 몸에 붙은 독수리의 날개같이 보일 뿐이다. 열심히 방법론을 연구하고, 학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며 노력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 몸은 여전히 파리라는 것이다. 설교는 어느 곳도 아닌 강단에서 배우게 된다. 신학교에서 배웠던 모든 방법론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남은 것은 없다.

 

잭 하일스는 이렇게 말했다. “복음 사역을 위한 훈련에 있어서 가장 서글픈 일은 아마 바로 그 사역이 스스로는 재생산시키지 못하는 유일한 전문직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수에 의해 가르쳐 집니다. 따라서 나는 설교에 있어서도 설교자가 설교자를 훈련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교학도는 성공적인 설교자들과 목회자들을 견주어 가며 배워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과학적인 설교와 조직적인 신학도 중요하지만 과학과 조직만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10. 목소리로 한몫 보려 하지 마십시오.

 

 이 땅에는 “약장수” 스타일의 설교자들이 많이 있다. 간혹 두려움도 느낀다. 새신자가 교회를 찾았다가 설교자의 설교를 장사치로 듣고 나가버리지나 않을까 싶다. 좋은 성대는 모든 설교자들의 흠모의 대상이다. 목회자가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설교 내용이 없어도 이미 50점은 따놓은 격이 된다. 그러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좋은 목소리가 아닌데 그 목소리를 좋아하니 이상한 일이다. 일명 “약장수” 스타일의 완전히 망가져 버린 목소리를 갖게 된 설교자가 많은 이유는 스스로 망가뜨렸거나, 목소리 관리미숙에서 온 현상이고, 여기에 그릇된 성도들의 무지가 협조된 작품이다. 일부 성도들은 이 망가진 성대 소리를 “은혜스럽다”는 이름으로 좋아하기까지 한다. 성도들이 그런 것은 그렇다 해도 목소리를 변조하여 목사다움을 유지하려는 이들은 어떤 이들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는 말했다. “무엇보다 제발 목사다운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얼마나 가공할 일입니까?...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역겨웁게 합니다.”라고 했다. 가장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가장 자연스럽다. 부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설교하는 것을 일생 들을 만큼 인내력이 뛰어난 교인들은 드물며 그것은 고문에 가깝다. 행여 그 망가진 목소리가 우리 주님의 영광에 ‘싸구려’ 혹은 ‘저질’ 이라는 딱지를 붙일까봐 염려스러울 뿐이다. 오늘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는 설교를 기대해 본다. ⓗ


예수가좋다오

출처 :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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