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험담과 비난보다, 칭찬과 격려를
‘직장 내 뒷담화’가 불러온 묻지마 폭행·테러의 원인과 방지책
어느 날 저녁 퇴근길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쏟아져 나오는 여의도이다.
한 남자가 칼을 숨기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자신이 지목한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미리 준비한 흉기를 꺼내 휘둘렀다.
피해자는 자신의 전 직장 상사였던 팀장과 동료 여직원이었다.
얼굴과 목, 배 부위를 흉기로 수차례 찌르고 도망쳤다.
도망치다 길에서 마주친 행인에게도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렀다.
짧은 시간이지만 광란의 순간이었다. 삽시간에 여의도 퇴근길은 피로 얼룩졌다.
이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뿔이 열 개 달린 괴물일까? 남보다 몇 배나 강한 심장을 가진 사람일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는 얼마 전만 해도 어느 신용평가사에 근무하던 30대 초반의 남성이다.
그곳에서 채권추심 관련 업무를 했다.
하지만 그는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 직장을 그만둔 후 대출 관련 회사에 입사했다.
그런데 거기서도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결국 또 다시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 그는 줄곧 놀면서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결혼도 하지 못했다.
3000만원의 빚을 지고 있는 신용불량자 신세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다지도 끔찍한 묻지마 칼부림을 저지른 것인가?
자신을 실컷 이용하고 퇴사하게 한 회사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 비참하게 된 자신의 처지가 모두 전 직장 동료 때문이라 생각했다.
믿었던 회사 동료가 자신을 험담하고 따돌려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다른 직장에 적응하지 못한 것조차 그들 때문이라 생각했다.
혼자 조용히 자살하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혼자 죽으려 생각하니 너무 억울했다.
보복하고 싶었다.
그는 화가 날 때마다 과도를 사 모았다.
그의 모든 생각은 보복이라는 두 단어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국 어느 날 퇴근 시간, 칼을 숨긴 채 회사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끔찍한 칼부림을 불러온 장본인이 무엇인지 아는가?
직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뒷담화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동료들이 하는 비방이 업무보다 몇 배나 더 힘들다.”
여의도 묻지마 칼부림 사건의 출발점은 다른 게 아니다.
“날 비난했던 전 직장 동료 6명을 죽이고 말겠어!”
믿었던 직장 동료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험담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직장 동료들의 비난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결국 무차별 칼부림을 불러온 것이다.
“뒷담화로 인한 스트레스가 업무로 인한 부담보다 훨씬 심하다.”
실제로 직장에서 험담이나 비난으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가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는 허다하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사무실에서 발생한 폭력 건수는 6234건에 달했다.
2007-2010년 각각 7871건, 8331건, 9154건, 7970건의 폭력 사건이 직장 사무실에서 발생했다.
2009년 한 리크루팅업체가 ‘직장인 험담’에 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직장 동료를 험담해 본 적이 있다’고 답변한 응답자가 80.2%에 이른다.
한편 미국 직장인들은 같은 내용의 설문 조사에서 22.1%만이 직장 동료를 험담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험담의 내용은 ‘업무 능력에 관한 것’(65.4%)이나 ‘성격이나 버릇에 관한 것’(53.0%)이 주를 이뤘다.
결국 직장인들은 평소 자신에 대한 평판 관리에 굉장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자신에 대한 평가가 폭력 행위를 조장하고, 마녀사냥의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 좋겠다.
장본인이 없는 곳에서 뒷말을 해서 그 사람의 인격이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아야 한다.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있다.
가장 먼저 죽어야 할 사람은 바로 험담을 하는 자신이다.
그리고 험담의 대상으로 칼도마 위에 올라와 있는 상대방이다.
어디 그 뿐인가?
비난과 험담에 맞장구를 치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난 맞장구도 안치고 듣기만 했는데….”
그럴지라도 당신 역시 죽음을 면할 수 없다.
비난과 험담을 하지 못하도록 막지 못한 죄 때문이다.
말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가 하는 ‘말의 힘’을 다른 쪽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오늘부터라도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칭찬해 보자.
칭찬할 게 없으면 찾아서라도 칭찬하자.
사실, 칭찬할 게 없는 사람은 없다.
단지 내 마음과 눈이 병이 들어서 다른 사람의 칭찬거리를 보지 못할 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위로받고 격려받기를 원한다.
힘들고 고달픈 세상에서 누군가 던져주는 위로 한 마디는 시들어가는 잡초에게 영롱한 아침이슬과 같다.
실패로 인한 좌절감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던져주는 격려 한 마디는 세상을 얻을 힘을 제공해 준다.
비난과 험담의 말은 불행한 무차별 칼부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칭찬과 격려의 말 한 마디는 쓰러져 있는 사람을 일이키는 힘이다.
우리의 관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험담과 비난에 대처하는 기술과 능력을 길러야 한다.
세상에 비난을 받지 않고, 험담의 대상이 되지 않을 완벽한 사람은 없다.
불완전한 인간들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처신과 상관없이 비난하고 험담의 칼도마에 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악의를 갖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험담을 쏟아 붓기도 한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럴 때마다 비난과 험담에 일일이 맞대응할 것인가?
그럴 필요 없다.
그 사람의 인격에 맡겨두면 된다.
예수님은 죄가 없이 완전무결한 분이셨지만, 욕을 당하셨다.
그러나 결코 맞서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용서로 그들을 포용하셨다.
남들의 비난과 험담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불완전한 존재이니까.
실수할 수밖에 없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비난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자기 처신을 함부로 하라는 말은 아니다.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한들 비난받지 않을 정도로 완벽할 순 없다.
삼가 조심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면 된다.
지나치게 민감한 것이 병이 될 수 있다.
최근 우리는 감정조절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반사회적 행동에 놀라곤 한다.
감정조절장애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순간적인 충동과 함께 고조된 긴장감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란 원래 절제와 통제 가능한 존재이다.
더구나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절제된 삶을 살도록 만드신다.
분노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치밀어 오르는 화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화를 삼킬 줄 아는 성숙의 훈련이 필요하다.
인격이란 무엇인가?
우리 안에 솟구치는 분노의 소용돌이를 적절하게 다룰 줄 아는 능력이 아니겠는가?
화난다고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순 없다.
생각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해석만 잘하면 어떤 감정도 통제할 수 있다.
이건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력과 훈련으로 얻을 수 있는 인격과 영성의 열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