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난해]양은 누구이고, 염소는 누구인가?
[난해]양은 누구이고 염소는 누구인가?
마태복음 25장 31절-33절
글/扈一麥
마태복음 25장 31절-33절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 중에 모든 거룩한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아서 모든 민족들을 자기 앞에 모으고 목자가 염소들로부터 자기 양들을 갈라내듯 그들을 일일이 분리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편에 두되 염소들은 왼편에 두리라. [킹제임스/흠정역]
신앙생활하면서 성경을 읽다보면 성도들의 질문이 목사님을 곤혹(困或)스럽게 하는 난해 성경 구절들이 가끔 있습니다. 대답하기 힘든 말씀이기에 문자적으로만 믿으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는 말씀만 보더라도 대칭이 되는 성경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 하나가 마태복음 25장 31절-34절의『양과 염소』비유 입니다. 이 비유를 물으면 시원한 대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셨는데 마치 행함이 없으면 지옥에 보낸다는 것을 예수님이 강조 하신 것처럼 보이는 성경 말씀이기에 예수님만 믿는 것 가지고는 구원에서 떨어지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구원 받을 것 같은 혼란을 가져 옵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일맥과 해결 해 보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25장 31절-33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 하는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이 세 비유는 ‘천국 비유’입니다. 그런데 세 비유 모두 인류의 ‘마지막 시점(omega point)'에 대한 비유입니다. 심판자리에서 마지막 판결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의 특징은 세 비유가 모두 신앙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 입니다.
1. 양과 염소를 구분한다.
겉보기에 비슷하면서도 같은 장소에 방목되어 사육되는 매우 다른 두 동물들로 양과 염소를 들 수 있습니다. 염소는 밤만 되면 추위에 약해 밖에 놓아 둘 수 없어 지붕 덮인 우리 속에 넣어야 하는데 양은 오히려 열린 공간을 선호합니다. 팔레스틴에서는 보통 양과 염소를 함께 사육합니다. 낮에는 같이 풀을 먹게 하고 저녁에는 떼어 놓습니다. 그 이유는 염소는 夜間의 한기 때문에 보호 차원에서 더 따뜻하게 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양은 밤에 신선한 공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염소와 함께 재울 수 없는 것 입니다. 염소가 추워서 견딜 수 없는 밤에도 양은 따로 떨어져서 잠을 잔다고 합니다. 반대로 여름에는 양들이 함께 모여서 잠을 잔다니 겨울에 함께 모여 잠을 자야 따뜻할 것인데 여름에 함께 모여 잔다는것은 사나운 짐승에 잡혀 먹지 않으려는 보호 본능이랍니다. 이처럼 양과 염소는 성향이 다른 동물입니다.
양은 매우 약한 동물입니다.
“양”이라는 동물은 자기를 보호 할만한 무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들이받을 수 있는 뿔이 없습니다. 사나운 발톱이나 이빨도 없고 노루나 사슴처럼 빠르지도 못합니다. 사나운 맹수와 싸움에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동물입니다. 독사처럼 독도 없고 말처럼 뒷발질을 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보호할 보호색도 없습니다. 푸른 풀 밭에 있으면 사나운 짐승의 눈에 더 쉽게 발각됩니다. 또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힘도 없습니다. 조금만 비탈지고 험한 길에서는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올라가지 못하고 도무지 제 몸도 보호할 줄 모르는 짐승이 양입니다.
① 양은 한번 뒤로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다리를 하늘로 향해 버둥거리다 보면 위 속에서 가스가 생겨 더운 지방에서는 3∼4시간만 지나면 양은 그대로 죽는다고 합니다. 목자가 그를 붙들어 일으켜 세워 주지 않으면 넘어진 채 버둥거리다 털이 흙이나 풀에 달라붙어서 도무지 일어나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② 겁이 많습니다. 사나운 짐승을 보면 우왕좌왕 어찌할 줄을 모르고 도망가다가 뒤로 벌렁 나자빠져서 네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경련을 일으키는 동물이 양이라는 동물입니다. ③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양은 길을 잃어버리기가 쉽다고 합니다. 양들은 한번 길을 잃어버리면 왔던 길을 되돌아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④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시력이 약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앞서가던 양이 절벽으로 떨어지면 다른 양들도 계속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또한 흉악한 늑대가 양을 잡아먹기 위해 올 때 서두르거나 급히 달려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시력이 약한 짐승이기 때문에 잘 볼 수가 없어 애를 쓰며 달려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⑤ 매우 어리석고 미련한 동물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자기가 늘 먹는 풀인데 이게 먹을 수 있는 풀인지, 못 먹는 독초인지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합니다. 매일 다니는 길인데 안내해 주지 않으면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사나운 짐승에게 잡아 먹히기 십상입니다. ⑥ 또 양은 아주 쉽게 더러워집니다. 아주 깨끗한 것 같지만 양은 매일 씻겨 주어야 되지요. 조금만 한눈을 팔면 뭘 묻히고 아주 더럽힘을 탑니다. 심지어 도살 장에 끌려가도 다른 짐승은 도살장에 끌려가면 눈치를 채고 도망가려 하고 죽지 않으려고 기를 쓰지만 양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지켜보고 있다가 메에- 소리 지르며 죽어갑니다.
이렇게 약하고 미련한 동물이 팔레스타인 산 중턱에서 살아 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산은 험하지요 계곡에 물은 급류지요. 그뿐입니까? 사자 늑대 곰과 같은 사나운 짐승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산에는 온통 가시덤불이었고 뜯어 먹을 풀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쯤되니 그 양을 돌보고 인도 해 줄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를 절대 신뢰하여 목자가 어떤 곳으로 인도하든지 순종하며 따라갑니다. 그래서 양과 염소를 목자가 갈라 놓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2. 본문 해석(解釋)
성도의 신앙은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은 율법을 지킴으로 상급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을 행한 자를 구원하고 선을 행치 않는 자를 지옥에 보내는 것 같은 말씀을 본문인 ‘양과 염소의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편 예수님을 양으로 표현한 말씀은 신약에 두 차례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일컬어 말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했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36)’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보고 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자없는 양(마 9:36),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마 10:6) 등이 그 예입니다. 이런 성경적 배경을 통하여 살펴볼 때 우리는 양이 매우 희생적일 뿐 아니라 착하고 유익한 동물임을 알 수 있고, 그게 또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염소에 대한 우리들의 편견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염소를 ‘저주받은 자, 지옥 갈 무리, 나쁜 동물’이라는 의미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편견은 십중팔구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염소에 대해 잘못 배운 탓입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유의할 대목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입니다. 목자는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으로 분별하였고, 이어서 나오는 임금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양의 좋은 점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염소의 나쁜 점을 발췌하여 소위 ‘저주받은 염소’를 만들어 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염소는 양처럼 모이지 않으며, 오히려 모인 양들을 들이받아 흩어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양과 염소는 참으로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함께 자랄 뿐 아니라 모양도 비슷한데, 좌편 우편으로 갈라 놓을 꺼리들이 있는 것입니다.신구약을 통하여 양이 좋은 동물로 얼마나 많이 기록되었나요? 그리고 양과 흑백으로 대조할 동물이 얼마나 필요하였나요?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 149번이나 나오는 염소를 마귀새끼로 너무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우선 팔레스타인의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함께 먹입니다. 염소가 무익하거나 저주받은 동물이라면 염소는 골라내 내다 버려야 하지만, 그들은 양과 염소에게 동일한 관심과 사랑을 베풉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믿는자와 안 믿는자를 골라내는 것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가라지를 마지막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하셨지, 그것을 가꾸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목자들은 염소를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양과 동일하게 양육합니다.
염소는 유월절 어린 양을 고를 때 양과 동등하게 취급되었습니다. 양이 없거든 염소로 대신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은 분명히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출 12:5)”라고 되어 있다. 양이 유월절 어린 양 즉 예수님의 모형이라면 염소 또한 예수님의 모형인 것입니다. 또, 구약시대에 염소는 양과 동등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5장 9절에서 하나님은 이미 염소를 양과 동등하게 요구하셨고, 그 후에도 염소는 항상 양과 동등한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9절 이하에는 오히려 모세가 양의 피보다 염소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속죄일에 사용하는 희생제물은 양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대로 아사셀 염소입니다. 대속죄일은 사람 사이의 속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를 회개하는 날로서, 지금도 환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모든 유대인들은 24시간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는 절기입니다. 이에 대해 레위기 16장 10절에는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찌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사셀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아사셀 염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나가 죽었다는 점입니다.
염소는 부정한 동물이 아니므로 백성들의 음식이 되었습니다. 염소는 되새김질을 할 뿐 아니라 굽이 갈라져 있으므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14장 4절에 보면 "너희의 먹을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염소는 사람들에게 젖을 제공해 주는 동물이기도 합니다(출 23:19). 여섯째로, 염소의 털은 성막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었고. 우리가 아는 대로 성막의 지붕은 염소털로 짠 것입니다(출 26:7). 염소털에는 양의 털보다 기름기가 더 많으므로 비나 이슬이 오더라도 곧바로 굴러 떨어지게 하므로 비가 새지 않고 수명도 길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예로 든 이유는 그것들이 팔레스타인에 흔한 동물이고, 실제로 목자들이 종종 양과 염소를 구별한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양은 희고 순하지만 염소는 검고 거칠어 상호 대조적이라는 점도 좋은 비유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요? 그 해석은 사실 본문 속에 이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라고 하였으므로 양과 염소의 이야기를 끌어 들인 이유가 바로 이 '구분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분별하는 방법은 영적 소속이 어디냐?
즉, 왕은 왼편에 있는 염소들을 향하여 저주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왼편에는 염소가 아니라 ‘義를 행하지 않은 자들’이 있어서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임금이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라고 저주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염소 자체를 ‘나쁜 동물’로 몰아 부치기 보다, 염소가 가진 성질이나 속성들을 들어 양과 비교하는 정도로 넘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방식으로 인간도 언젠가는 '영적 소속'에 따라 분별 될 것임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지, 양과 염소 그 자체는 여기에서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나는 어느쪽인가? 궁금해 할 것 없습니다.
계시록 20장11절-15절에「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물러가고 그것들의 자리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 바다가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매 그들이 각각 자기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았고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는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구원받은 자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이고, 지옥갈 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입니다. 이미 성도는 자신이 구원 받은 자냐 아니냐를 압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는 저녁에 주인이 소와 말, 닭과 오리를 분별하여 각각 다른 마굿간으로 들여 맨다는 비유로 바뀌어도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마태복음25장 31절-33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영광의 보좌는 심판자리 입니다. 이미 행위록에 모든 것이 적혀 있어서 그 책에 기록된 대로 판결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의로운 일을 행한 자들은 한결같이 자기가 언제 착한 일을 하였는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5장34절-40절「그때 그 왕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 ‘이리 와서 세상의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해 마련해 두신 나라를 상속하라.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됐을 때 나를 맞아들였다. 내가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봐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 주었다.’ 그때 의인들이 대답할 것이다. ‘주여, 언제 주께서 배고프신 것을 보고 우리가 먹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께서 목마르신 것을 보고 우리가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우리가 맞아 들였으며 언제 주께서 헐벗으신 것을 보고 우리가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우리가 찾아갔습니까?’ 왕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들 중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4.지금은 은혜의 기간 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이 말씀처럼 어떠한 죄를 지어도 예수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해 주시는 기간입니다. 가끔 정부에서도 자수하는 기간을 두어서 그 기간 동안에 지은 죄를 자수하면 그 죄에 대하여 용서해 주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해(年)를 넘기면 심판자리에 가게 됩니다. 그때에는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영광의 보좌(심판의 자리,재판의 판결자리)에 앉게 됩니다. 양과 염소를 분리하는 것 같이 구원 받은 자와 심판을 받을 자를 구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양을 오른 편에 두고 염소를 왼 편에 둔 것은 구약시대부터 오른 쪽은 영광과 존귀와 생명과 힘의 상징으로 이해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출15:6, 욥30:12 등 참조) 반면에 왼편은 저주와 사망과 미련함과 힘의 상실을 상징했습니다.(삿3:15, 전10:2 등 참조) 그러나 평소부터 양이 선한 동물이고 염소는 악한 동물이라는 의미는 전혀 없으며 단지 흰색 양과 검은 색 염소를 대비해 선과 악, 생명과 멸망을 상징적으로 비교한 것 뿐입니다.창세기에 야곱이 양을 칠때는 얼룩양이 야곱의 것일 때도 있었습니다.
양이 선해서 흰색이 되었거나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뜻이 생명이요, 선이라는 의미로 흰 양을 비유한 것 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선행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온순한 양이신 예수님 편에 있는 자를 마지막 때에 구원과 심판 둘로 확실히 나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목자가 양 떼와 염소 떼로 나누는 행위에 비교시킨 것 뿐입니다. 따라서 여기 내 형제란 누구를 말하는지부터 분명하게 정의를 해야 합니다.
거듭하여 강조하지만 주님의 관심은 오직 천국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말씀에서 말하는 내 형제란 우리의 혈육이나 이 세상을 위한 관계에 따른 형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형제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어져 가는 지체를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내 형제'라는 말은 육적인 관계를 묘사하지 않을 경우 같은 예수를 믿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방이나 주님을 따르지 아니한 불신자를 '형제'라고 부른 확실한 증거 구절이 신약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 '형제'라는 이 말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10:38-42)과 교회 공동체에 속한 자들 중에서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18:1-14)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앞부분에는 이웃을 돌보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보여주는 문단이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5장38절-48절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면 주어라 그리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주어라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흘리신 피로 인하여 내 죄를 사함받고 은혜(공짜,값없이,예수님이 나 대신)로 구원 받았습니다. 심판 자리에 가면 예수님이 내 대신 빌라도와 가야바의 재판을 받으셔서 내가 심판 받을 것이 없고 대신 상을 주실 것입니다. 지금도 믿지 못하면 그 날에 심판 자리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자와 자기 행위로 열심을 내던 자들이 구별 될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고 오직 상급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믿음이 아닌 어떠한 것도 구원의 방법이 아닙니다.
누가복음10장 20절「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피흘려서 죄 값을 다 치뤄 주었는데 아직도 자기가 무엇을 보태려고 한다면 믿는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선언을 하셨는데 그것을 못 믿고 구원받기 위해 자기의 義을 보태려고 하는 성화주의자나 율법주의자를 구별하실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죄를 예수의 피로 사함 받은 것이지 우리의 의로 사함 받은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놓은 집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안에 같이 있는 것으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지 않았습니다.우리는 죄가 있지만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구원의 복음안에서 두려워 하지말고 자유를 누리고 마지막 날의 심판 자리를 면하시는 자들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