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기는 믿음
세상을 이기는 믿음
고전13:1-13(8-9절을 중심으로)
설교 : 유해무 교수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차 시비를 가리기 위하여 파출소에 가 보니까 같은 교인이었고, 그것도 한 교회의 교인이었다는 소리를 종종 듣게 됩니다. 양보하지 못하는 한국교회 교인들, 이것은 한국교회가 양적으로는 성장하였을지라도 사회를 빛과 소금으로 개혁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루터는 인류를 두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과 이 땅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임금으로 섬기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칼과 이 세상법은 소용이 없다고 그렇게 단언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신자라면 세상의 직권자들도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끼리는 법이나 칼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 여러분! 한국 성도들이 너무 악합니까? 아니면 루터는 이 사실을 모르고 너무 낙관적이었습니까? 이제 성도 사이의 소송은 비일비재하고 우리 고려파안에는 목사와 장로가 서로 법정투쟁을 하여도 노회가 무관심하는 사태가 얼마전에 일어났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죠. 우리 교회안에, 우리 교인들 사이에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둡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선지자로서 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이 말씀을 행하셨습니다.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던지지심으로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얼마나 복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제자의 길을 살펴볼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전에 이 제자의 길을 걸어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서 우리는 제자의 길을 살피며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믿음은 이깁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우리는 양보가 윤리적인 선행인줄 압니다. 그러나 양보가 윤리적인 선행이기 이전에 믿음의 소산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서 대개 양보를 잘한 아브라함이 추앙을 받게 되어지고 양보를 못하고 먼저 선택한 나이어린 롯은 비난의 대상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 것을 일단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온 아브라함은 일단 유목민이기는 했지만은 그곳에 임한 가뭄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에서 얼마를 머무르고 난 다음에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정착을 했습니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은 반 유목민이었습니다. 그가 풍부해졌고 롯도 가축떼가 있었기 때문에 양가의 가축떼를 먹일 수 있는 물과 풀이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양가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산악지대요 벧엘의 지방을 생각하면 피할 수 없는 상황이고 그 상황은 이미 벌어져 버렸습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이미 정착하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즉 그곳은 이 새로운 반유목민이라도 받을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제안을 했습니다. 해결을 해야할 연장자이기 때문에 제안을 합니다. “롯아, 너와 나는 한 골육이 아니냐 너와 나, 내 목자와 너의 목자가 서로 다투게 해서는 안되겠다. 저쪽에도 땅이 있고, 이쪽에도 땅이 있고 사방에 땅이 있으니 너가 내게서 떠나면 되지 않겠느냐? 너가 이쪽을 가면 내가 반대로 가고, 너가 저쪽으로 가면 다시 반대편을 내가 택하겠다.” 칭찬받을만한 처사입니다. 아니게 아니라 그는 연장자이고 삼촌입니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족장시대인 것을 고려할 때에 연하자가 연장자를 먼저 알아서 대우하는 것이 합당한 것 아닙니까?
“우리는 한 골육이 아니냐? 너가 내 수하가 아니냐?” 조심스럽지만 “너가 알아서 처신하라.”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네가 먼저 선택하라 그러면 내가 먼저 그 선택을 존중하겠다.” 존중해 준다는 것은 다시는 다툼이 없게 내가 너와는 떨어져서 살겠다.
이것은 바로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의 자세인 것입니다. 사실 한 골육은 나이를 근거로 한 가족내의 어떤 질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랫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있는 사랑을 한 골육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지도자의 모습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머리로서 이와 같은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양보하는 사랑의 자세를 갖춘 지도자 그리고 그의 지도는 목자들의 다툼을 잠재웠고 가문의 평화를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위에 일어날 수 있는 허다한 일과 꼭 같습니다.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될 수 있는 그 순간에 그 어른 중에서도 머리인 아브람이 기선을 잡고서 문제를 잘 해결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지도자는 싯점을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한 번 보십시오 지도자가 없습니다. 양보하는 지도자가 없습니다. 양보하는 지도자는 전체의 유익을 구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전체 교회의 유익을 생각합니다. 교회의 유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싯점을 잘 포착할 수 있고 그는 교회내의 허다한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질 위험이 있는 그 싸움들을 제 때에 파악을 하고 잠재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싯점을 잘 파악하고 제때에 전체의 유익을 구하는 지도자의 결핍으로 우리 한국 교회 특히 고려파는 상처투성이, 만신창이가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양보할 수 있는 지도자, 사랑의 지도자가 화평을 이룹니다. 이 점에서 아브람은 양보를 통하여서 윤리적인 선행을 했습니다.
친구여러분! 우리 자신의 유익을 너무 많이 구하지 마십시다. 우리 전체의 유익을 구합시다. 우리 교회를 염두에 두십시다. 지금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들을 한 번 보십시오. 언필칭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자기의 역사 이전에 하나님께서 고난과 핍박을 통하여서 유지해 주시고 이 한국 사회와 세계를 위하여서 지켜 주셨던 그 교회인데 그 교회를 자기 일신상의 유익을 구히기 위하여서 지금 소란을 지기면서 훼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다해서, 연장자라고 해서 당연하게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죠. 지도자는 사랑과 화평을 구하는 자이고 때를 알아서 자기 몸을 불살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친구 여러분! 여기에서 끝이 난다면 이것은 반쪽 해석이고 사실은 무의미한 해석입니다. 이와같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꼭 안 읽어도 됩니다. 우리가 성경 아니라도 잡다한 세상 이야기를 통하여서 설교시간에 들려지는 수많은 예화를 통하여서 이와같은 교훈은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말 잘하는 웅변가도 할 수 있고 사회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언론가도 이와같은 이야기는 할 수가 있습니다.
흔히들 롯을 욕심장이라고 묘사하면서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행동을 추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성경 베드로 후서 2장 7절에는 의로운 롯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망각하고 롯을 절대로 까뭉개서는 안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아브람의 양보는 윤리적인 선행이기 이전에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은 언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칠 그때에 비로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믿음의 조상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조상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행한 여정에 있는 이 일도 바로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믿음의 행위입니까? 사실 우리는 서로 헤어지자는 제안을 박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숙부로서 헤어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을까요? 더군다나 이들은 반유목민으로 적대적인 그룹 사이에 살아야 했던 소수 그룹입니다. 차라리 헤어지지 않고 같이 있었으면 문제가 훨씬 더 잘 해결 되어졌다고 여길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유목민이라고 한다고 해도 어른이 되어서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한편 비난을 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브람은 인간 사이의 관계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었던 그것은 아브람의 믿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 자세가 바로 확립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양보할 수 있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었고 우선권을 연하의 롯에게 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그의 믿음은 그에게 씨와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에서 연유합니다. 소규모 유목민들이 여정에 있으면서 다툰다는 것, 이것은 자멸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혈육과 혈육끼리 다툰다는 것은 정착민들에게 어부지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한 번 보십시오. 교회가 이런점에 있어서 얼마나 지혜롭지 못합니까? 교회가 얼마나 적대적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 교회가 왜 자기의 유익을 구함으로 이와같이 파멸을 자초하고 적대적인 세상앞에서 우리가 변화시켜야할 그 세상에게 어부지리를 제공하고 있는지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나안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땅이 협소하다는 것을 뜻하지만 동시에 그 적대세력이 적대적이고 호전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줄을 믿음의 조상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멸망은 뭡니까? 바로 씨와 땅의 약속을 한 몸에 받은 믿음의 조상이 자기가 순간적인, 일신상의 유익을 구하는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이 축복, 하나님의 약속을 좌절시킬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기 몸을 잘 간수해서야 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삶의 당연한 현실에서 그 현장 배후에서 자기를 통치하고 있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적대적인 정착민들과 그 조카 롯의 태도를 잘 파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를 큰 민족으로 이루고 그와 그 자손에게 비록 산악지대이지만 다툼이 일어나고 있는 그곳을 주시마고 이미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친구 여러분! 이 본문은 앞에도 한 사건이 있고 뒤에도 한 사건이 있는 그 중간에 있습니다. 애굽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얼버무리면서 처신하는 어중간한 아브라함, 그리고 씨를 제사드리는 단호한 아브람의 믿음의 행위 사이에 처해져 있습니다. 아브람의 거짓말이 미화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한 거짓말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그 약속을 스스로 이룰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죄요, 약속을 스스로 주시고 성취시켜 주실 그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지요. 바로 이것이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는 어중간한 불신앙의 자세와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자기 몸을 간수하려는 이 양보는 약속의 씨,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훌륭한 처신인 것입니다. 아브람은 벧엘에 남음으로 먼저 양보를 했습니다. 그것은 싸움을 피하여 자기 몸을 몸을 보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 몸을 보존함으로 자기 몸에 주어진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양보하기 전에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동시에 롯이 떠남으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했던 것입니다. 험한 나그네길에 아브람은 이렇게 쉽게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아브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자기 몸에 약속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몸에 예수의 흔적들을 지녔습니다.
친구 여러분! 우리도 의연하게 처신합시다. 성령 안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담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서 그들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게 하여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행이기 전에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윤리적인 선행인 양보는 뿌리가 아니라 그 뿌리의 열매일 뿐인데 뿌리는 약속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요, 신앙의 열매로서 신앙의 결과로서 양보와 의연한 처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믿음안에 있는지 우리 처신을 한 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정말로 양보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로 우리 몸을 불살라서 투신할수 있는 믿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까? 아브람의 한 행동이 아브람의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세상을 이깁니다. 믿음의 조상도 양보하여 이겼습니다. 그리고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자신을 간수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버려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도들로 준비하고 있는 우리들은 믿음으로 이겨야 겠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우리 앞길에 각양 적대적인 세력이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를 어렵게 만들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의 흔적을 우리 몸에 지닌 자들이기에 남들이 할 수 없는 선행을 하며 아주 단호하게 의연하게 처신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그것을 통화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확실한 믿음의 주의 제자들이요, 믿음의 조상의 후손들, 믿음의 사도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