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0]천연계(天然界)와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제(交際)함
[10]천연계(天然界)와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제(交際)함
263 구주의 지상 생애는 천연계와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제하는 생애였다. 이 교제를 통하여 그분께서는 능력 있는 생애의 비결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열렬하고 지칠 줄 모르는 일꾼이셨다. 그분보다 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살아간 사람은 없다. 세상의 슬픔과 죄의 짐을 그분보다 더 무겁게 졌던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아를 불태우는 그런 열성을 가지고 일한 사람은 없다. 그럴지라도 그분께서는 건강한 생애를 사셨다. 영적으로는 물론이요 육체적으로도 그분께서는 “흠없고 점없는”(벧전 1:19) 희생 제물의 어린양으로 대표되셨다.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분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순종함으로 모든 인류에게 성취되기를 기대하신 모본이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쳐다보았을 때, 그분의 얼굴에서 거룩한 동정심, 그리고 그들이 감지할 수 있었던 바 능력이 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분은 영적 생명의 분위기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분의 태도는 친절하고 겸손한 반면에, 그분께서는 감취어 있으면서도 완전히 숨겨질 수 없는 어떤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였다.
주님께서는 봉사의 생애 동안 당신의 생명을 노리는 교활하고 위선적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추적을 당하셨다. 정탐꾼들은 그분을 따라다니면서 그분을 대적할 기회를 포착하고자 그분의 말씀을 주시하였다. 그 나라의 가장 영리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논쟁을 통하여 그분을 패배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없었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의 비천한 교사에게 패배와 수치를 당하여 싸움터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264 그리스도의 교훈에는 사람들이 이전에 결코 소유해 본 적이 없는 참신함과 능력이 있었다. 심지어 그분의 원수들까지도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지내신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세대의 인위적 습관에 물들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목수간의 작업장에서 일을 하며 가정 생활의 짐을 지고 순종과 수고의 교훈을 배우시면서 천연계 속에서 휴식을 찾으셨다. 그리하여 천연계의 신비를 이해하고자 애씀에 따라 그 속에서 지식을 얻으셨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셨다. 그리고 그분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노동하던 장소를 떠나 들로 나가 조용한 산골짜기에서 명상하고, 산허리나 수풀의 나무들 사이에서 하나님과 교통할 때였다. 이따금 이른 아침에 어떤 후미진 장소에서 명상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시는 그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찬미의 노래로써 아침빛을 맞이하셨다. 그분께서는 감사의 노래로써 당신의 노동 시간을 즐겁게 하고, 수고에 지치고 낙심한 사람들에게 하늘의 기쁨을 안겨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봉사 생애 동안 대부분을 옥외에서 보내셨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여행하실 때 그분께서는 걸어다니셨고, 대부분의 교훈은 이따금 혼잡한 도시를 떠나 조용한 시골을 찾아가심으로써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단순성과 믿음과 자아 희생의 교훈에 훨씬 잘 조화가 이루어지게 하셨다. 열 두 제자를 사도로 임명하고 산상 설교를 하신 곳은 갈릴리 바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아니한 산허리의 나무 그늘 아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푸른 하늘 아래서, 풀이 많은 언덕 위에서, 호숫가에서, 사람들을 당신의 주위에 모으시기를 좋아하셨다. 265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들로 둘려있는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인공적인 것으로부터 천연적인 것으로 돌이킬 수 있었다. 천연계의 성장과 발전에 그분의 나라의 원칙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만드신 언덕들과 그분의 손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작품들을 바라볼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귀중한 교훈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미래의 어떤 날 그 거룩한 교사의 교훈들은 천연계의 사물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반복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신은 향상되고 마음은 휴식을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사업에 그와 함께 협력하던 제자들을 이따금 얼마 동안 해방시켜 줌으로써 가정을 찾아가 휴식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을 활동에서 떠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분께서는 온종일 당신께 나오는 무리들에게 봉사하셨다. 그리고 땅거미질 무렵이나 이른 아침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통하기 위하여 산 속에 있는 성소를 찾아가셨다.
쉴 새 없는 활동과, 원수와 랍비들의 거짓 교훈과의 투쟁이 그분을 완전히 지쳐버리게 했으므로 이따금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그분의 생명이 희생당하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분께서 고된 하루를 마치고 여러 시간 기도 드린 후 돌아오실 때, 그들은 그분의 얼굴에서 화평의 모습을, 그리고 그분의 온몸에 퍼져 있는 듯한 활기와 생기와 힘을 목격하였다. 매일 아침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단 둘이 여러 시간을 보내신 후 얻은 하늘의 빛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자 나아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첫 선교 여행에서 돌아오자 즉시,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라고 명령하셨다. 제자들은 복음의 사신으로서 성공한 기쁨을 안고 돌아왔다. 그 때 그들은 헤롯의 손에 침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66 그것은 심한 슬픔과 낙망의 소식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침례 요한을 옥에서 죽도록 버려두심으로써 제자들의 믿음에 큰 시험을 준 것을 아셨다. 동정 깊은 친절로써 그분께서는 슬픔의 눈물에 젖어 있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셨다. 주님께서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의 눈과 음성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
갈릴리 바다 북쪽 끝, 벳새다 가까운 곳에 싱싱한 봄철의 신록으로 꾸며진 아름답고 조용한 장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휴식하게 되었다. 그 장소를 향하여 그들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갔다. 여기에서 그들은 혼잡한 군중들을 떠나서 휴식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반박과 비난으로 방해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주님과 교제함으로 짧은 기간의 친교를 나누고자 희망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만 짧은 기간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귀중한 것들이었던가. 그들은 복음사업과, 사람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진리의 보화들을 열어주실 때, 그들은 거룩한 능력으로 힘을 얻고 희망과 용기로 고취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무리들은 그분을 찾아나섰다. 그분께서 흔히 휴식하러 가시던 장소에 계시리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은 그곳까지 그분을 따라왔다. 단 한시간의 휴식이라도 얻어 보고자 했던 그분의 희망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양들의 선한 목자이신 그분께서는 당신의 순결하고 동정 깊은 마음 속에, 끊임없이 갈급한 심령을 가진 그 무리에 대한 사랑과 자비만을 가지고 계셨다. 하루 종일 그분께서는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셨다. 그리고 밤이 되자 그들을 흩어 가정으로 돌아가 쉬게 하셨다.
267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완전히 헌신하는 생애를 하시는 가운데 구주께서는 끊임없는 활동과 인간의 필요에 부딪히는 일을 떠나서 휴식을 찾고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한 교제를 나누어야 할 필요를 깨달으셨다.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이 떠나가자 그분께서는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오직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고난당하고, 죄 많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당신의 심령을 쏟아놓으셨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쉬지 않고 일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시고,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주소서 하라”(마 9:38)고 명령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최초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바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수고에 지친 당신의 일꾼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훈련을 받고 있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과, 천연계와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할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세상과 세상의 풍습과 습관에 일치되지 않은 생애가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얻는 일에 있어서 개인적 경험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분께서 마음 속에 말씀하시는 음성을 개인적으로 들어야 한다. 모든 다른 음성이 그치고 정적 속에서 그분 앞에 나아갈 때, 조용한 심령은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확실히 구별하게 된다. 그분께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모든 활동에 있어서 효과적인 준비가 된다. 분주한 군중들과, 긴장된 생애의 활동 속에서 이와 같이 기운을 회복한 사람은 빛과 화평의 분위기에 싸이게 될 것이다.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의 생애는 향기를 발산하고, 사람들의 심령을 움직일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
믿음의 모험
268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마 9:21)함이라. 이 말은 한 불쌍한 여자, 곧 12년 동안 그의 생애를 괴롭힌 질병으로 고생한 한 여자의 말이었다. 그는 그의 모든 재산을 치료비로 써 버렸지만, 다만 고칠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치료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의 희망은 소생되었다. 그 여자는 “만일 내가 그분께 이야기할 수 있으리 만큼 가까이 갈 수만 있다면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 유대의 랍비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중이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막 5:23). 이 간절한 탄원은 부드럽고 동정 깊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 회당장과 함께 그의 집을 향하여 즉시 출발하였다.
그리스도의 주위에 많은 무리들이 에워싸 밀었기 때문에 그들은 천천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군중을 뚫고 나아가시는 중에 구주께서는 앓는 여자가 서 있는 곳 가까이 이르셨다. 그 여자는 주님께 접근하고자 거듭거듭 애를 써 보았지만 실패하였다. 이제 그 여자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그분에게 이야기 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시는 주님의 진로를 방해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분의 겉옷을 만짐으로 치료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그래서 그는 고침을 받을 기회를 놓칠까 염려하면서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온전하게 될 수 있으리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
269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자의 모든 생각을 아시고 그가 서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셨다. 그분께서는 그 여자의 큰 필요를 깨달으셨으며, 그가 믿음을 행사하도록 그를 도와 주고 계셨다.
그분께서 지나가시자 그 여자는 손을 내밀어 그분의 겉옷자락을 간신히 만지는데 성공했다. 그 순간 그는 고침을 받은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그 일촉(一觸)에 그 여자의 일생의 믿음이 집중되었다. 즉시 그의 고통과 연약함은 사라졌다. 그 여자는 그 순간에 온몸을 통하여 흐르는 전류와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에게 완전한 건강이 주어졌다는 느낌이 왔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 5:29).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해진 그 여자는 12년의 오랜 세월을 통하여 의사들이 한 것보다 더 큰 일을 단 한 번의 접촉으로 이루어 주신 위대하신 치료자 예수님께 감사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여자는 감사한 마음으로 군중 속에서 빠져나가고자 노력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고 주위를 둘러보시며,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질문하셨다.
베드로는 놀란 표정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눅 8:45)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라”(눅 8:46)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주의성 없는 무리들의 우연한 접촉과 믿음의 접촉을 분별할 수 있으셨다. 누군가가 심각한 목적을 가지고 그분을 만졌고 응답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그 진상을 알고자 질문하지 않으셨다. 그분께는 사람들과, 당신의 제자들과, 그 여자에게 줄 교훈이 있었다. 그분께서는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희망으로 고무시키고자 하셨다. 그분께서는 치료의 능력을 가져온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를 원하셨다. 그 여자의 믿음을 설명 없이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되었다. 270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가 감사한 마음으로 나타내는 신앙고백으로 영광을 받으셔야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그의 믿음의 행위를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그에게 이해시키기를 원하셨다. 그분께서는 다만 절반쯤 축복한 채 그 여자를 보내기를 원치 않으셨다. 자기의 고통을 주님께서 알고 계셨다는 것과, 그분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과 능력을 믿는 그의 믿음을 그분께서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지 못한 채 그 여자를 버려두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 여자를 바라보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누가 당신을 만졌는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것을 깨닫고, 그 여자는 떨면서 앞으로 나아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는 감사의 눈물을 머금고 모든 사람 앞에서 그가 그분의 겉옷을 만진 이유와 즉시로 고침을 받게 된 내력을 그분께 이야기하였다. 그 여자는 그분의 겉옷을 만진 것이 일종의 참람된 행위가 아니었는지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입에서는 한 마디의 책망도 나오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다만 칭찬하는 말씀만을 하셨다. 그 말씀들은 인류의 불행에 대한 동정으로 충만해진 사랑의 마음에서 나왔다. 그분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8:48)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그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을까. 이제 그의 기쁨을 쓰라리게 만들었던 공포감은 사라졌다.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어 온 호기심에 찬 군중들에게는 생명력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분을 만진 병든 그 여자는 고침을 받았다. 그러므로 영적 일에 있어서는 우연한 접촉과 믿음의 접촉이 구별된다. 그리스도를 단순히 세상의 구주로 믿는 믿음은 영혼에게 치료를 결코 가져다 줄 수 없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단순히 복음의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므로 내가 그분을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요 3:16)된다. 내가 그분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나는 그분의 구원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271 내가 이제 사는 생애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일종의 견해로 생각한다. 구원하는 믿음은 일종의 거래로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하나님과 언약 관계로 연결하게 된다. 산 믿음은 활력과 신뢰심의 증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산 믿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사람에게 승리하는 능력이 된다.
믿음은 죽음보다 더 강한 정복자이다. 만일 병자들로 하여금 믿음의 눈으로 강력한 치료자 예수님을 바라보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놀라운 결과를 목격할 것이다. 그것은 육체와 심령에 생명을 가져다 줄 것이다.
악습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일할 때, 그들이 신속히 달려가고 있는 절망과 파멸을 지적해 주는 대신, 그들의 눈을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라. 그들에게 하늘의 영광을 주목하게 하라. 이것은 속절없고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앞에 펼쳐져 있는 무덤의 온갖 공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육신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하게 될 것이다.
한 백부장의 종이 중풍병으로 누워 있었다.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종은 시장에서 사고 파는 노예였으므로 이따금 능욕적으로, 또한 잔인하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 백부장은 그의 종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종이 회복되기를 매우 소원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구주를 보지 못했지만 그가 들은 소문은 그에게 믿음을 일으켜 주었다. 유대인들의 형식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로마인은 그들의 종교가 자기의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정복자와 피정복민을 분리시켜 놓은 민족적 편견과 증오의 장벽을 이미 헐어 버렸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존중하였으므로 그분께 예배하는 유대인들에게 친절을 나타내었다. 그에게 전해지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는 진리를 발견하였다. 272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영적인 것은 구주의 말씀에 반응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이 예수님께 접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유대의 장로들에게 호소하여 그의 종을 고쳐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었다.
그 장로들은 그 사정을 예수님께 아뢰면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 7:4, 5)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백부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께서는 백부장 자신이 보낸 기별, 곧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6절)라는 기별을 받으셨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길을 걸어가셨다. 그러자 백부장이 직접 나와서 그 기별을 종결지었다.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 7:7; 마 8:8, 9).
“나는 로마의 권세를 대표하며, 나의 군사들은 나의 권위를 최고의 것으로 인정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며, 모든 피조물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주님께서 질병을 떠나가도록 명령하시면, 그 질병은 당신에게 순종할 것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 8:13).
유대의 장로들은 백부장이 자기들의 민족에게 보여 준 호의 때문에 그를 그리스도께 추천하였다. 그들은 백부장이 “회당을 지었”기 때문에 그가 합당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273 그러나 백부장은 자기 자신에 관하여 합당치 못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럴지라도 그는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의 선행을 신뢰하지 않고 구주의 자비를 신뢰하였다. 그의 유일의 주장은 그에게 있는 큰 필요성이었다.
꼭 같은 방법으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5) 하신다. 그대는 그대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하나님께 내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지금이나 미래에 호소할 탄원의 조건은 전혀 속절없는 우리의 상태, 곧 그분의 구원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상태이다. 자아를 의존하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우리는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말할 것이다.
“내 손에는 가지고 갈 아무런 대가도 없고 다만 당신의 십자가에만 매달립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우리를 하늘과 연결시켜 주고 암흑의 세력을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갖 악한 기질을 정복하고 아무리 강한 유혹이라도 모두 저항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므로 그리스도께로부터 떠나 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속절없이 무가치한 그대로 자비하신 구주의 긍휼 앞에 자신을 내어놓으라. 자아를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사람들 사이에 다니시면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신 분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강한 구속주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약속을 생명나무의 잎사귀처럼 붙잡으라.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274 그대가 그분께 나아갈 때 그분께서 받아 주신다는 것을 믿으라.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 사실을 이미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렇게 하는 한, 그대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1, 32).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 39).
동양에 알려진 모든 질병 가운데 문둥병이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그 병의 불치성과 전염성, 그리고 그 병이 희생자에게 끼치는 끔찍스러운 결과 등은 가장 용감한 사람일지라도 공포로 가득 차게 하였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이 질병을 죄로 말미암아 받는 심판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을 “재앙”, 혹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불렀다. 그 병은 뿌리를 깊이 박고 근절할 수 없으며 치명적이었으므로 죄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의문의 율법에 의하여 문둥병자는 부정하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가 만진 것은 무엇이나 부정하였다. 공기는 그의 호흡으로 불결해졌다. 문둥병자는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사람들이 사는 거주지에서 격리되었다. 그 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을 받는 사람은 자신을 제사장에게 보여야 하였고, 제사장은 자세히 살펴본 후 그의 상황을 결정해 주어야 하였다. 만일 문둥병자라는 선고를 받게 되면, 그는 자기의 가족과 격리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고, 다만 같은 환자들과만 사귀도록 운명이 지워졌다. 심지어 왕들과 통치자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이 무서운 질병에 걸린 군주는 홀을 버리고 사회를 떠나가야 하였다.
277 문둥병자는 친구와 친척들을 떠나서 그의 질병의 저주를 견디어야 하였다. 그는 자신의 재난을 공포하고, 옷을 찢고, 경고의 음성을 높임으로 전염성이 있는 병자에게서 피해 가도록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어야 하였다. 외롭게 추방된 자가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치는 슬픈 음조는 공포와 증오를 알려주는 신호였다.
그리스도께서 봉사하시던 지역에는 그 병으로 고통 당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분의 사업에 대한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지자, 마음 속에 믿음이 솟아나기 시작한 한 사람이 있었다. 만일 예수님께로 갈 수만 있다면 그는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 영원히 격리될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워진 그가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께 어떻게 자신의 몸을 내보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를 고쳐주실 것인가? 주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이나 심지어 자기에게 저주를 선언하고 사람들이 다니는 곳에서 피해 가라고 경고한 의사처럼 하지 않으실 것인가?
그는 예수님께 대하여 들은 바를 모두 생각해 본다. 그분께 도움을 구한 사람 중에 한 사람도 그냥 돌아간 사람은 없었다. 그 가련한 사람은 구주를 찾고자 결심한다. 비록 마을과 격리되어 있을지라도, 산길을 따라 뚫려 있는 어떤 소로를 지나가시는 예수님과 마주칠 수도 있고, 마을 밖에서 가르치고 계시는 그분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려움이 많을지라도 그것이 그의 유일의 소망이다.
그 문둥병자는 멀리 떨어져 서서 구주의 입에서 나오는 몇 마디의 말씀을 듣는다. 그는 예수님께서 병자들 위에 손을 얹으시는 것을 본다. 그는 절름발이, 소경, 중풍병자, 그 외 여러 가지 질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일어나서 구원받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본다. 그의 믿음은 강해진다. 그는 청중들이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이 접근해 간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속박, 사람들의 안전, 모든 사람이 자기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공포감 등을 깡그리 잊어버린다. 그는 다만 치료를 받는다는 복스러운 소망만을 생각한다.
278 그는 몸서리칠 만큼 보기 흉하다. 그 질병이 무섭게 잠식해 있었으므로 썩어가는 그의 육체는 보기에 끔찍스럽다. 그를 보자 사람들은 뒤로 물러간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느라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예수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자 애를 쓰지만 헛일이 되고 만다. 그는 그들을 보지도 않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는다. 아연 실색하는 그들의 표정은 그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을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음성만을 듣는다.
그는 예수님께로 달려가서 몸을 그분의 발 앞에 던진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부르짖는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 8:2, 3)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손을 그 사람 위에 얹으신다.
즉시로 그 문둥병자에게 변화가 생긴다. 그의 피는 정결해지고, 신경은 감각을 얻고, 근육은 튼튼해진다. 문둥병자의 특징인 부자연스럽게 흰, 비늘 모양의 피부는 사라진다. 그의 살은 어린아이의 살처럼 된다.
만일 제사장들이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은 사실에 관해 내력을 알 것 같으면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증오심 때문에 부정직한 판결을 내릴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공정한 판결을 얻기를 바라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고침받은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 이적에 관한 소문이 퍼지기 전에 지체말고 예물을 가지고 성전에 가서 몸을 보이라고 명령하셨다. 제사장들은 그와 같은 예물을 받기 전에, 예물을 바친 자를 살펴보고 그가 완전히 회복된 사실을 확인해야 하였다.
그와 같이 몸을 검사하는 일을 마쳤다. 그 문둥병자에게 추방을 선고했던 그 제사장들이 그의 병이 완치된 것을 증명하였다.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은 가정과 사회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건강의 은혜가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원기 발랄한 남성으로서 가정에 돌아가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279 예수님께서 주의를 시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치료에 대한 사실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쁨으로 돌아다니면서 자기를 완전하게 고쳐 주신 분의 능력을 전하였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 왔을 때, 그는 “온몸에 문둥병”이 들어 있었다. 문둥병의 치명적 독소가 그의 온몸에 퍼져 있었다.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을 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자 애를 썼다. 왜냐하면 문둥병자를 만진 사람은 스스로 불결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을 문둥병자 위에 얹으셨지만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셨다. 문둥병은 깨끗해졌다. 죄의 문둥병. 곧 뿌리를 깊이 박고, 치명적이며, 인간의 능력으로 깨끗함을 받을 수 없는 죄의 문둥병도 그와 같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사 1:5, 6)다. 그러나 인성을 쓰고 오신 예수님은 더럽힘을 받지 않으신다. 그분의 임재는 죄인에게 치료의 힘이 되셨다. 누구든지 그분의 발 아래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믿음으로 말을 하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어떤 치료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구한바 축복을 즉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문둥병의 경우에는 호소하자마자 즉시 응답을 받았다. 우리가 세속적 축복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지체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 외의 다른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기도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생애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갈 1:4)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 15).
280 예수님께서는 근심되고 마음이 괴로운 자들, 희망이 꺾인 자들, 세속적 기쁨으로 심령의 갈급을 진정시키고자 애쓰고 있는 자들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부르사 당신 안에서 쉼을 얻으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수고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마 11:29)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셨다.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모든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모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벗겨주실 수 있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우리가 지고 있는 가장 무거운 짐이 죄의 짐이다. 만일 우리가 그 짐을 질 수밖에 없도록 버려졌다면, 그것이 우리를 찌그러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그 짐을 지셨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주님께서 우리의 죄짐을 지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피곤한 어깨에서 짐을 벗겨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것이다. 근심과 슬픔의 짐 역시 그분께서 지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근심을 당신께 맡기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당신의 마음에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류의 맏형님 되시는 주님께서는 영원한 보좌 곁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구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바라보신다. 그분께서는 경험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이 무엇이며, 우리의 소원이 무엇이며, 우리를 시험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히 4:15)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떨고 있는 연약한 하나님의 자녀인 그대를 살펴보신다. 그대는 시험을 받고 있는가? 그분께서 건져주실 것이다. 그대는 연약한가? 그분께서 강하게 해주실 것이다. 그대는 상처를 받았는가? 281 그분께서 고쳐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며,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 147:4, 3)신다.
그대의 염려와 시련이 무엇이든지, 그대의 사정을 주님 앞에 내놓으라. 그리하면 그대의 정신은 넉넉히 인내하게 될 것이다. 난처하고 어려운 일에서 스스로 해결될 길이 그대에게 열려질 것이다. 그대 자신이 연약하고 속절없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그분의 능력 안에서 그대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대의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그대의 짐을 져주시는 분에게 그 짐들을 맡김으로써 얻은 안식은 더욱 복될 것이다.
환경이 친구들과 헤어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넓은 바다의 출렁거리는 물결이 우리와 그들 사이에 가로놓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환경도, 어떤 거리도, 우리를 구주와 분리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분께서는 우리 우편에 계셔서 우리로 쓰러지지 않게 해 주시고, 옹호해 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위로해 주신다. 그리스도께 구속받은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욱 크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안식하면서 “그분께서 나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셨으므로 내가 그분을 의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인간의 사랑은 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할 줄을 모른다. 우리가 도움을 얻고자 그분께 부르짖으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손을 펴신다.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 54장 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