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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복(禮服)을 입지 않아서 버리운 자

힘찬 발걸음 2011. 6. 14. 23:57

예복(禮服)을 입지 않아서 버리운 자

 

마태복음 22장 1-14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천국을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푸는 어떤 왕과 같다고 비유하시면서 말씀하신 "왕실 혼인잔치의 비유"가 나온다. 왕이 종들 을 보내어 이미 초청한 몇 몇 귀한 손님들을 오라고 했더니, 초청 받은 이들이 모두 오기를 싫어한다는 말을 듣고, 왕은 다른 종들을 또 보내어 혼인잔치에서 대접할 풍성한 식단까 지 소개해 가면서 다시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 밭일이 바쁘다고 밭으로 가고, 또 한 사람은 상업차 길을 떠나고, 나머지 초대받았던 나머지 손님들은 왕의 종을 능욕하고 죽였습니다. 그러자 노한 왕은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그러면서  잔치 준비는 끝났음을 알리고, 이미 초청받은 이들은 이 잔치에 합당한 사람들이 아님을 확인하고,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22:9) 오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잔 치에 손님이 가득하였다"(22:10).

 
왕은 다시 그의 종들을 보내어 좋은 자나 악한 자나 데려와서 자리를 채우라 하셨습니다. 다 채운다음 왕이 하객들을 보러 왔을 때 한사람이 예복(禮服)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고 물었을 때 그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었습니다. 왕은 사환에게 그 사람의 수족(手足)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하셨습니다.

첫 번, 두 번 청했던 사람들은 유대사람들을 가리키지만 뒤에 선한 자나 악한 자들은 우리 이방인들을 가리키지요 왕께서는 사거리에서 데려왔던 삶들의 성품이 선하거나 악한 것을 탓하지 안하시고 예복입지 않고 들어왔던 자만 처벌하였습니다. 진리를 알기 전에 악했거나 선했던 것은 진리를 받은 뒤에 성령께서 말씀으로 변화시키셔서 그리스도의 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기 전에 포악했던 과거의 인간성이 양처럼 변화 된 형제들을 제가 많이 알고 있습니다. 진리가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옛 사람이 변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선한 일이십니다.

 

왕은 거기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초대받고 들어 왔던 그 사람은 유구무언(有口無言) 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왕은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의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 두운 곳"에 던지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할말을 잊은 사람은 참으로 통탄(痛嘆)할 일입니다. 거리에 있는 사람 억지로 불러다 가 혼인잔치에 앉게 해서 앉은 것뿐인데, 혼인잔치에 걸맞은 예복(禮服)을 입지 않았다고 손 을 묶는 것으로도 모자라 발까지 결박하여 땅 속 어두운 곳에 가두다니! 정말, 당한 사람으로서는 이를 갈 일입니다. 미리 초청을 받았다면 예복을 준비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거리에서 돌아다닐 때 입던옷 그대로 초청 받아 왔는데, 무슨 예복이란 말인가! 또 다른 손님들도 다 마찬가지로 혼인찬치에 갈 생각도 못하고 거리로 나왔다가 여기 잔치 자리에 온 이들인데, 도대체 그들은 또 언제 어떻게 예복을 준비하여 입고 왔단 말인가?

 

 ■ 언젠가 어느 친구에게 초대를 받아 서울의 어느 "클럽 하우스"라는 데를 가본 일이 있습니다. 때는 여름이어서 넥타이를 매지 않는 정장 윗도리를 입고 갔습니다. 그런데,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식당 종업원이 나의 길을 막습니다.  "손님, 죄송합니다. 여기 식당에는 정장을 하셔야만 출입이 됩니다. 초청하신 분께서 이미 말씀하셨을 줄 압니다." "네,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 식대로 정장을 하고 왔습니다." "넥타이를 매셔야 합니다." "이것은 넥타이를 매지 않는 옷인데요." "그래도 매셔야 합니다. 여기 규정이 그러합니다. 손님 같은 분을 위해 우리가 넥타이를 준비했습니다."

 

종업원이 여러 개의 검은색 계통의 넥타이를 벌써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더 완강하게 버틸 처지도 아니고 해서, 약간은 바보 같은 느낌이 들어도 바보들의 축제에 온 기분으로 노타이셔츠 차림에 목 둘래 맨 살에다가 검은 타이를 매고 들어갔습니다. 나는 우리 일행이 와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모두들 나의 기괴한 패션에 놀랐습니다. 나는, "예복을 안 입고 오면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날까 봐 이렇게 넥타이를 매고왔습니다" 하고 말했고, 초대받 은 손님들은 모두들 나의 바보 같은 옷차림을 보고 한바탕 웃었습니다. 좀 지난 옛이야기인데요. 스트레킹이라는 단어를 아세요? 발가벗고 뛰면 법에 걸리는데 다 벗었지만 넥타이를 목에 매고 뛰면 잡을 수 없다는 법이 있었습니다.

 

 나는 좌중(座中)을 둘러 보며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었던 같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왕실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도, 거기 뜻밖에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길가던 사람들이 어느 사이에 예복을 준비하여 그것을 입고 예식에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혹시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주인이 예복을 주지 않았을까요? 왕에게 혼난 사람은 종업원들이 그런 예복을 입으라고 주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그냥 들어왔다가 임금에게 죄인 취급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고요..."

 

■ 생각해 보니 그럴 것 같습니다. 주석들을 보니, 모두 나처럼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혼인잔치를 차려놓고 손님을 초대한 주인은 손님들이 위에 예복으로 걸칠 것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가 그것을 걸치고서야 예식장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하는 풍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미리 초대받고 온 이들이 아니고 평상시에 거리에 있던 이들을 초대했을 경우에는 더 더욱 주인이 이런 예복을 준비했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복을 준비했는데도 그것 입기를 거절한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초청자인 주인을 모독한 것일 것입니다.

 

■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유대교에서 특별히 거룩하게 여기는 곳에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들어 갈 사람들을 위한 긴치마와 어깨와 팔을 가릴 웃옷을 입구에 준비해 놓고 그것을 입고서야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곳이 있습니다. 왕의 잔치자리에 초대장은 이미 오래 전에 나갔습니다. 예언자들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켜 장차 올 구원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잔치가 벌어졌을 때 초대받은 이들은 초대에 응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기껏 거리에서 초대받은 이들 중에도 예복 입기를 거절해서 쫓겨난 이들도 있습니다.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그 초대에 걸맞은 삶을 산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힘드는 것일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는 말도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 예레미아 13장23절을 보면 “구스 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흔히 옳은 행실의 옷을 입어야한다고 말을 하면서 예복을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흑인이 그 피부를 하얗게 할 수 없고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없는 것 같이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씀합니다. 불가능 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할 수 없다고 하면 굉장히 기분 나뻐합니다. 자기는 분명히 잘하고 있고 아주 못하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취급하면 마음이 상합니다.

 

너무도 죄송한 말씀 이지만 자기의 행실의 옷을 입고 들어가는 자는 그것은 교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줄때 뭐라 맹세합니까? 다 지키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죄를 안져본 아담도 실패했는데 우리가 성공할 수 있다고요? 지금도 교회 안에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하나를 범하면 다 범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의 보혈의 거룩한 옷으로 우리의 더러운 의를 가릴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왕이 준비한 예복(禮服)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체질을 아시기 때문에, 불가능하기 때문에 야곱과 같이 형의 옷(義)를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뭐라 해야합니까? 내가 예수입니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야곱이 에서의 옷을 입고 이삭앞에서 좀 뻔뻔하지만 할 수가 없잖습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양심도 없이 뻔뻔합니다. 하지만 살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방법을 선택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옷을 입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옷으로 예복을 주실때 나를 감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의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받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열심은 하나님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위의 옷을 입겠다는 사람은 하나님이 만들어준 의의 옷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천국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옷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보면 야곱은 꾀를 안써도 가나안땅에 들어 갈수가 있었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누운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이 꾀를 쓴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는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믿지 않고 자기 노력으로 예복을 준비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이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잔치집에서 예복을 나누어 주는데 입지않는 사람들은 부자입니다. 자기 행실의 깨끗한 옷과 자색 옷을 입으므로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싶은데, 똑같이 주는 예복(禮服)을 입으면 자랑을 못합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런 자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된 예복을 원치않는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 혼인 잔치의 거룩한 예복, 거룩한 행실이 예수님의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권면이며, 또한 경계의 말씀이며 초청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함을 받은 이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택함을 입었음을 안다면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굳게 하시기를 바랍니다.扈ⓗ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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