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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옛 사람을 벗어버립시다.

힘찬 발걸음 2011. 1. 11. 03:24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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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을 벗어버립시다.

에베소서 4:17-24/하원식 목사 

 

 우리나라에는 새해를 맞이할 때 목욕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요즘에는 집집마다 욕실과 샤워시설을 갖추고 있어 이런 경향이 많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연말연초가 되면 대중목욕탕이 만원사례를 이루고는 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목욕을 하는 이유는 새로운 기분으로 새 출발을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몸에 있는 때를 밀면서 자신의 마음에 묻은 때도 함께 밀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에 이런 풍습이 생겨났을 것이다.

 

 새해 첫 주일 신년 주일을 맞이할 수 있도록 복 주시고 지켜주시고 은혜와 평강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해 천안 함 폭침 사건과 년 말에 연평도 포격 사건을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2010년을 보내고 새로운 새해를 맞이한 신년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달력이 바뀐다고 새해라고 생각하는가? 바뀐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나라 이름도 대한민국 그대로이고. 이명박 대통령도 그분 그대로이고, 정치인들도 이기주의가 가득한 그 사람 그대로이고, 여러분의 직장 사장님도 그 사람 그대로이고.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 목사님도 그분 그대로 인데 무엇이 새해라는 것인가? 말로만 새해 인사를 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이 바뀌지 아니하면 새해가 아니다.

 

 여러분의 성품이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믿는 후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데 무엇이 새해고 새 마음인가? 진정으로 새해를 맞이하려거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란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이 아침, 우리는 실수와 허물과 죄로 얼룩졌던 지난날들을 잊어버리기로 하자. 대신 주님과 더불어 벅찬 기대와 소망을 안고 새로운 시간의 여행을 시작하기로 하자. 그리하여 올 한 해 동안 늘 감사와 승리의 찬송이 울려나도록 하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2011 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늘 동일한 시간이지만, 새해의 아침은 특별히 일년 중 다른 그 어느 날보다 신선하고 싱그러운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만큼 새해 아침에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크고, 우리의 마음은 새로운 설레임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새로운 첫 아침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지난해의 피로가 지난날의 안타까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헤매는 분들도 종종 있다. 이제 모든 지난 일들은 아침 안개처럼 말끔히 걷어 버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이 빛나는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지 않겠는가? 오늘 맞은 이 새해를 더욱 빛나는 한 해로 장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정하고 힘차게 달려나가시기를 소망한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옛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새사람이다. 옛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이며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고 새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이며 진리를 아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인간은 옛사람의 삶을 살수도 있고 새사람의 삶을 살수도 있다. 인간은 인간이면서 짐승처럼 살수도 있고 인간답게 살수도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수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요건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봄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벗어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는 것이다.(17-22)

그러면 벗어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예수 믿지 않고 있을 때에, 즉 이방인으로 있을 때, 불신자로 있을 때의 행동을 벗어버리라는 것이다.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오늘 본문은 자세하게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옛사람의 모습이 어떠함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17-21절)

 

1. 허망한 모습이다.

“무익한” “쓸모 없는”이란 뜻으로 '쓸모 없는 생각'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목적 없이 헛된 것에 욕망을 기울여 무익하고 공허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말한다.

 

2. 18절에 보면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말씀한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졌다고 한다. '총명'이란 헬라어는 '사랑을 인식할 수 있는 중심부'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마음이 어두워져서 더 이상 궁극적이 진리를 인식할 수 없을 나타낸다. 총명이 어두운 사람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새 사람은 총명이 밝은 사람이다. 척하면 알아듣는 사람이다.

 

3. 옛사람의 특징은 "무지함"이다.

바로 무지는 모든 죄의 근원이다. 학생들이 공부 열심히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모르기 때문이다.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 공부를 할 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좋은 시간, 젊음의 시간 다 허비하고 이마에 주름이 늘어갈 때쯤 아, 그때 놀지 말고 열심히 공부할 껄! 모르니까 아까운 시간들을 허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르면 죄를 짓다. 하나님을 모르면 무엇이 죄고 무엇이 죄가 아닌지 모른다. 성경을 영어로 Bible이라고 하고 또한 Canon이라고도 한다. Canon이란 "법규 또는 잣대"라는 뜻이다. "키가 몇 cm냐" 물을 때 자가 없으면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없으면 무엇이 죄고 무엇이 죄가 아닌지 알 수 없다. 성경은 죄에 대한 법규가 된다.

 

4. 옛사람의 특징은 마음이 굳어진 것이다.

18절에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말씀한다. 굳어있다는 말의 헬라어의 원 뜻은 "석회석"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마음이 석회석처럼 단단히 굳어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굳어있다는 다른 말은 교만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제일 잘 났다고 생각해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것이다. 감각 없는 자 되어 방탕한다. 이것은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어떠한 것에도 제한을 받지 아니하며 수치나 두려움을 모르고 육욕에만 얽매여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인들은 죄에 대한 불감증환자이다. 그렇기에 죄를 짓고도 가책조차도 없고 오히려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 생명에서 떠나게 되는 모든 요소를 버려야 한다.(17,18)

어떤 평론가는 현대인의 정신 문화에 대해서 말하면서 "현대의 문화는 많은 수단과 방법은 개발했지만 목적과 목표는 개발하지 못했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잘살기 위한 수단과 잘살기 위한 방법은 개발하고 있지만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의 목표를 상실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아무리 최첨단의 엔진과 원자 에너지로 만든 배라 할지라도 가야할 목적지가 없는 배라면 표류하는 배에 불과 한 것처럼!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은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표류하는 배가 물결 흐르는 대로 떠내려가듯이 타락의 길로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타락한 인생은 어두움에 빠지게 되고 그 어두움이 영적인 무지를 불러오고 총명이 어두워져 지식은 많으나 지혜가 없는 인생들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적으로 굳어져서! 다시 말씀드리면 "마음이 마비되었다"라고 하는 해석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해야 할 것은 좋아하지 못하고 좋아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좋아하는, 가치관이 상실된, 양심이 마비된! 그래서 죄를 짓고 멸망으로 가고 있으면서도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빌립보서에 말씀하신 대로 "...배로 하나님을 삼으며 부끄러움을 오히려 영광으로 아는.."(빌3:19)도덕적 불감증에 빠진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란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주님을 멀리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란다.

 

2. 이러한 것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1. 더러운 욕심대로 행하는 행위를 벗어버려야 한다.(19)

이런 실화가 있다. 소매치기로 한 밑천 잡은 50대 초의 한 사람이 이제는 생활이 안정되어 소매치기 생활에서 은퇴하고 몇 해 동안은 평범한 시민으로써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어느덧 그를 시집보내는 날이 되었다. 딸의 결혼식이 끝난 뒤 일가 친척과 친지들을 모시고 큰 잔치가 베풀어 졌다. 그는 하객들 사이를 누비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어느덧 술에 취하게 되었고 밤이 깊어져서 손님들은 한 사람 두 사람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손님들이 다 돌아간 후 침실로 들어와 옷을 벗으려 하는데 왼 일인지 그의 옷이 묵직하더랍니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벗어 논 옷 속을 뒤져보니 주머니 속에서 시계. 목걸이. 반지. 돈지갑. 따위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못된 소매치기 버릇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되살아나서 모처럼 모여든 절친한 하객들의 소지품들을 몽땅 털어 버린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끝내 자신의 저주스러운 버릇을 버리지 못하여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것에 대하여 괴로워하다가 자신의 손도끼로 소매치기를 했던 자신의 왼손을 힘껏 내리찍고 말았다. 그의 왼손은 잘려져 나갔고 결국 그의 상처가 덧나는 바람에 그는 죽고 말았던 것이다.

 

 한번 길들여진 버릇은 이렇게 고치기가 어렵다. 버릇 고치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치기 어려운 일 중에 하나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버릇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천병만마를 쳐 이기기는 오히려 쉬우나 내 버릇을 이기기는 어려운 일이니 우리는 이 일에 일생을 노력해야 한다" 수 십 년 묵은 나의 버릇을 개조한다는 것은 천명의 병사나 만 마리의 말을 쳐서 이기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다.

 

 버릇의 힘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이다. 세상에 버릇처럼 무서운 것이 없고 버릇처럼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주는 것이 없다. 버릇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 손버릇이 나쁘면 불행한 사람이 되고. 손버릇이 좋으면 행복한 사람이 된다. 말버릇이 고약하면 천박한 사람이 되고. 말버릇이 고상하면 품위 있는 사람이 된다. 게으른 버릇이 있으면 실패자가 되고 부지런한 버릇이 있으면 성공자가 된다. 그러니까 버릇에 따라 사람이 달라진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고가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이 말을 거꾸로 말하면 "인간의 운명을 바꾸려면 성격을 바꾸어야하고, 성격을 바꾸려면 습관을 바꾸어야하고, 습관을 바꾸려면 사고를 바꾸어야한다는 말이 된다."

 

결국 한 개인이나 한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행복한 운명으로 개조하려면 그 근본은 인간의 사고를 개조하고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고의 개조. 생각의 변화가 모든 변화의 시발점이요. 일체의 개혁의 시작이 된다는 말이다. 문제는 사고의 개조나 생각의 변화가 어디서 오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보다 확실하고도 귀중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본문 21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라" "저희가 감각 없는 자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욕심을 따라 사는 생활이다.

 

 그 생활이 더럽다. 하나님도 없고 내세도 없고 소망도 없고 현세만 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욕심대로 즐기고 살다가 죽는 것이다. "저희는 다 감각 없는 자가 되고" 말았다. 이 말에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오늘날 감각 문화가 얼마나 발달되었는가! 그런데 감각이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이것은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반응해야 할 것들! 하나님에 관한 것! 영적인 것에 관한 감각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욕심을 벗어 리지 못함으로 남을 손해나게 하고, 더러운 음모를 꾸미고, 양심을 팔고, 눈에 보이는 대로 좇아 살고 마음에 원하는 대로 행하려고 하는 이 더러운 욕심을 벗어 버려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버리지 못하면 결국 감각 없는 자가 되고, 자신을 방탕한 생활에 던져 버리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도 없고, 성령 님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요, 결말인 것이다. 여러분 이전에 가졌던 욕심이라는 옛사람을 벗어버리시기 바란다.

 

2.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2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여기서 구습이란 예수님을 믿기 전에 불신자였을 때에 하던 세상 풍습, 습관을 말한다. 요즘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궁합을 본다! 날을 받는다! 하는 이런 행위가 다 구습이다.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권면하고 계신 것이다.

 

 "썩어져 가는 구습.."은 지금까지 끊어버리지 못한 습관을 말한다. 사람이 죽는 것도 많은 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 병이 생기면 그것 때문에 합병증이 되어서 죽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한가지 병 때문에 평생을 고생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끊어버리지 못한 것이 한가지라도 남아있으면 그것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 시간에 생각나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3.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23-24절 말씀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러분, 성경 말씀의 표현을 주의해서 보자. “새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한다. “옷을 입는다”는 옷을 입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입던 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그런데 입던 옷을 벗지 않고 그 위에 옷을 껴입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몸이 불편하지요. 행동이 거북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옛날의 나”를 벗어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나”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런데 갈아입지 않고 껴입는 것이 문제이다. 껴입으니까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예수 10년 믿어도 변화가 되지 않는 사람, 무엇이 문제인가? 10년이면 강산(江山)도 변한다는데 예수 믿은 지 10년이 되어도 변하지 못하는 사람, 무엇이 문제인가? 세월은 많이 지나갔지만 예수를 잘못 믿었다.

 

 20절에 그 말씀이 나와 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옛날의 나”를 헌 옷처럼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나”로 새 옷처럼 갈아입어야 하는데 헌 옷 위에 새 옷을 껴입은 것이다. 그렇게 예수 믿으면 죽어도 변화되지 않는다.새사람이란 말은 앞에서 나온 옛사람과 대조되는 말이다. '새사람'은 문자 적으로 '갓 만들어낸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이룩하신 구속사역을 통해 재창조 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된 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한다.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면 당명을 바꾸었다고 새로운 당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개혁을 하였다고 한다. 사람이 바뀌지 않았는데 당명이 바뀌었다고 새로운 정당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거듭나는 것이라고 한다. 거듭나는 것도 두 가지가 있다.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과 삶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은 한번 남으로 영원히 나는 것이다. 그러나 삶으로 거듭나는 것은 일생 계속되는 거듭남이다.

 

 영적으로는 새 사람이 되었는데 삶이 따라 주지 않기에 교인들이 세상에서 비난받다. 여러분들은 다 영적으로는 거듭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새사람을 입으라는 말은 생활로 거듭나자는 말이다. 새해에는 새 사람 되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안에서 부탁한다.

 

 우리가 새 옷을 입으려면 헌옷은 벗어버려야 한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겉옷을 달라고 할때 자기의 겉옷을 벗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벗을 뿐만 아니라 둘로 찢어 버렸다고 말하고 있다.(왕하2:12) 옛사람을 벗어버릴 때에 헌옷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벗어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과거를 벗어 버려야 된다. 과거에 잘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도 잊어버리고 사시기 바란다. 과거에 아무리 잘 한것이 있다 하더라도 잊어버리시기 바란다.

 

이제 새롭게 태어나서 무엇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처럼 겸손히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시기를 바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으심이라는 단어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지으셨다. 그리고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시킴으로 다시 지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지음을 받아야 한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아야 한다.

 

의로 지음을 받는 것은 모든 생활 가운데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되어 악에 물들지 않은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를 지으신 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와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지으시는 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 사람 되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워야 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0절)."

 

 여기서 배운다는 것은 지식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배운 것을 말한다. 말씀을 통해 새로운 삶을 배워야 한다. 이방인들은 허망한 마음이 있고 총명이 없는데, 우리는 진리가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해야 한다. 말씀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 새 사람이 되기 원하는가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말씀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새 사람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과거에 집착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만을 붙잡고 고통 하는 사람이 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상처를 바라보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상처를 통해서 더욱 깊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하심을 체험하게 하신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되돌릴 수 없는 이미 흘러간 시간을 가장 아쉬워하고 연연해하는 반면 가장 뜻깊고, 가장 중요한 일들을 놓치고 현실을 소홀히 하기 쉽다. 과거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나쁜 것이라 해도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과거에 집착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미 과거는 이미 흘러간 물과도 같다.

 

 우리가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것은 지나온 시간이 얼마나 훌륭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시간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이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고 소망하는 미래는 자신의 과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하늘로부터 큰복을 받을 수 있다. 우리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다면 주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새 일을 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상처로 인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은 상처를 치유 받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은혜로 다가온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깊은 상처까지 알고 계셨고 사랑해주셨다는 것도 깨닫는다.

 

 현재가 늘 중요한 것이다.

과거의 잘한 것을 붙들고 있으면 과거 자랑하고 하다보면 전진이 안 된다. 내가 옛날에 아무리 큰 일을 했어도 다 잊어버리고 달려가시기 바란다. 그리고 과거의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도 그것 때문에 붙잡혀 고민하지 마시고 잊어 버려야 된다. 이미 주안에 들어 와서 우리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기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잃어버린 죄인 하나를 찾으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 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하셨다. 오늘도 주님이 여러분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환영하여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란다. 이 시간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옛사람을 벗어  버리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란다. 그러면 이제 결론적으로 우리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입어야 할 새사람은 어떤 것인가!

 

40년 동안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소모전을 한 사울 왕도 질투라는 상처, 버림받았다는 상처에 노예가 되어 일생을 허비하였다. 그리고 결국은 주님의 버림을 받았다. 어떤 사연으로 상처를 받았던 간에 상처를 가지고서는 주님의 쓰임을 받지 못한다. 상처에 울고, 상처로 인하여 뒤틀린 인격으로 성장했을 때 그 상처를 안고 우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 상처로 인하여 우리가 고통받는 것을 아시고 주님은 우시고, 함께 고통을 나누어 함께 나누며 대신 슬픔을 담당하신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완벽한 인격, 완전한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모습 그대로, 그 존재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조용히 주님 앞에 내어놓을 때에 그 상처를 깊은 은혜의 사건으로 바꾸어놓으시는 분은 성령 님이시다.

 

 상처가 깊으면 깊을 수록, 하나님의 은혜도 더 깊어진다.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주님의 부요는 더 드러나는 것이다. 상처로 인하여 너무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상처로 인하여 우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 때문에 또는 선하지 못한  마음 드려다 보고 실망하지 마시오. 그냥 마음 비우고 사모하고 기도로 채우시오. 주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와서 상처를 내어놓으세요.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얼마나 괴로웠느냐고 말씀하시는 주님에게 우리의 피곤하고 지친 영혼을 주님께 있는 그대로 맡겨 드리고 주님이 주시는 쉼 안으로 들어가서 한없으신 은혜 속으로 들어가시오.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신다. 이 말은 성화 되어 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라는 것이다. 성도의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조류로서 약 70세까지 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40세가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만 한다 40세 쯤이면 솔개는 발톱이 노화해 사냥감을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가 없게 된다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고 또한 깃털이 짙고 두텁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겁게 되어 하늘로 날아 오르기가 나날이 힘들어 진다. 이 무렵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던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러운 갱생의 과정을 수행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 부근을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러운 수행을 시작한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든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는 것이다. 그런 뒤 새로 돋아난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엔 날개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그리하여 반년 뒷면 솔개는 새 깃털이 돋아나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곤 다시 힘차게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는 것이다 변화와 개혁을 위해서는 묵은 습관과 전통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우화이다.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며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미래가 펼쳐지는 것이다. 천국에서 부자가 누구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은 자이다. 우리는 목초를 가꾸든 잡초를 가꾸든 둘 중에 하나이다. 옛 사람을 입든 새 사람을 입든 둘 중에 하나이다. 새 사람 되기를 사모하는 자에게 새 사람 되는 축복이 있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료:예수가좋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