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이 시대는 방법론을 원하는 시대다. 이는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차원에서도 원하는 바이다. 다시 말해 현 시대는 이렇게만 하면 100% 성공한다든지, 아니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손에 잡히는 매뉴얼을 요구하는 시대다. 이것은 소위 일반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각각의 지역 교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와 같은 요구는 현 시대에 팽배한 사고방식 혹은 정신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종종 일반 서점뿐만 아니라 기독 서점에 들러 보면 기독 서적 가운데서도 방법론에 대한 책들이 상당수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만 하면 교회가 부흥되고, 기도가 응답되고, 부자가 된다"는 책들이 넘쳐난다. 즉 성공주의를 지향하는 방법론적인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험생들을 위한 서적이나 학습 문제지 등을 보아도 '핵심 매뉴얼'이라는 타이틀을 내 걸고 "이 한 권의 책만 습득하면 만점이 보장된다"는 지나칠 정도의 광고를 싣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이와 같은 현상이 보여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이와 같은 책들을 독자들이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 이는 곧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용적이고, 결과 지향론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시대정신을 가리켜서 '좋다' 혹은 '나쁘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방법론은 '본질'과 '정신'을 언젠가는 잃어버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독교 안에서의 이와 같은 방법론은 우리의 신앙을 율법주의나 형식주의로 몰고 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가장 큰 문제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방법론이란 인간 편에서의 노력을 100% 신뢰하는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 때문에 방법론이 우리 삶에 들어서는 그 순간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섭리'는 그 자리를 잃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기도 응답의 방법, 성공하는 방법, 부흥하는 방법 등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손에 잡히는 방법론을 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은 손에 잡히고, 명료하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것을 원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어찌 보면 이것이 동물과 인간의 차이 중에 하나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성향이 때로는 우리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이 구하는 방법론이 하나님의 자리를 밀어내고 나아가 문제의 '본질'과 '정신'을 외면하도록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면에서 구약 성경은 방법론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십계명'이 그렇고 '그 외의 율법 조항들'이 그렇다. 실제로 구약에서는 본질과 정신 보다는 형식, 곧 방법이 우선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구약 성경에 제시된 그 방법론적인 측면을 '본질과 정신'으로 바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방법론 그 이상의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신약 성경에서는 그것을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진리'라고 말한다. 때문에 요한복음 8장 32절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다시 말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눈에 보이는 방법론 즉 '형식'과 '방법'보다는 '본질'과 '정신'이 더더욱 중요함을 강조하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형식과 방법을 완전히 무시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면 그것 역시도 잘못이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다. 즉 형식과 방법이 본질과 정신보다 우선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2장 9~16절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비결'에 대한 방법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원의 정신과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인간인 우리 입장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료한 정의'고, 또한 '구원을 얻는 명료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론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구원이란 우리 인간의 노력과 특정한 방법론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사도 바울이 특별히 로마서 2장 9~16절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한 다양한 본질과 정신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사람은 조건을 통해 구원을 얻지 않는다고 말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9~11절)
11절에 등장하는 '외모'라는 말은 '생김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조건'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때에 '특정한 조건'에 의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택하셔서 자녀 삼으심은 많은 이들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만한 나름의 가능성을 보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본인이 속한 장로교의 교리는 아니다. 우리가 믿는 바는 아무런 공로와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요, 칼뱅이 말한 바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종종 '겸손'을 가장하여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무슨 조건에 의해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처럼 행동하거나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무엇인가 나으니까 구원을 얻었다"는 사고방식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 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 모른다. 이는 마치 과거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택함 받은 '선민'이라는 '선민사상'에 찌들어져 있던 모습과도 너무 닮아 있다.
때문에 이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세계관은 더더욱 이방인들과 자신들을 분리하고, 경계하고, 자신들만의 우물 속으로 그들을 몰아갔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거룩'을 요구하셨다. 즉 세상과 구별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과거 구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그저 특정한(부정한) 장소, 시간, 사건, 사람 등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 그것이 '거룩'인 줄 알았다. 그러나 구약의 이와 같은 '거룩'의 방법론 곧 '율법과 형식'으로는 '완전한 거룩'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거룩'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거룩'의 '본질'과 '정신'을 알려 주시기 원하셨던 것이다. 바로 그 사건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거룩하신 그 하나님께서 친히 죄악으로 더러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구약의 개념으로 볼 때에는 '거룩'이 아니라 '부정' 그 자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그들의 잘못된 세계관을 철저하게 뒤집어 엎으셨다.
결국 우리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11절에 등장하는 외모의 '거룩', 즉 '조건적인 거룩'과 '조건적인 구원'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지금 이 시간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니깐 거룩하다. 혹은 구원받았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날마다 금식을 하고, 사람들을 구제하고, 남들보다 학력이 좋고, 남들보다 착한 말을 많이 하고, 욕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노래방에 가지 않고, 술자리에 가지 않고, 담배를 태우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고, 모든 예배에 100% 출석하고, 날마다 전도하고, 늘 순종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지각하지 않고, 반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착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내가 ~을 했기 때문에 구원이 보증 된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구원을 자꾸만 '조건화'시키려 한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다. 즉 남들보다 내가 무엇인가를 더 배웠고, 무엇인가를 더 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우리는 자주 착각을 한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너는 헬라인이기 때문에 안 되고, 나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좀 더 낫다"는 이와 같은 썩은 생각 자체를 버리라고 말한다. 오직 구원의 근원은 외모로, 즉 조건적으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만 있음을 사도 바울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아 신분의 변화가 찾아온 이들이다. 그러나 신분이 변했다고 해서 죄성의 본질이 사라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세상 사람'이란 말로 불신자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밤거리를 술과 방탕함으로 즐기는 이들을 향해 무의식적인 정죄 의식과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할 때가 종종 있다.
"저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눈물이 나요,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그들을 향해서 그렇게 말할 처지가 못 된다고 생각한다. 오직 그들을 진정으로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왜일까? 사실 우리나 그들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단지 '죄'로 인해 겉으로 드러내는 형태만 다를 뿐이다.
그들은 드러내 놓고 술을 먹고, 우리는 숨어서 술을 먹는다. 그들은 앞에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우리는 성경을 인용해 가며 기술적으로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그들은 드러내 놓고 성적인 죄를 짓고, 우리는 숨어서 그들을 구경한다. 그들은 직장에서 싸우고 우리는 직장과 교회에서 싸운다. 그들은 술자리에서 욕하고 우리는 총회와 구역 모임에서 누군가를 욕한다.
솔직히 다를 게 없다. 왜 다를 게 없을까? 그 이유는 11절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말한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조건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조건에 맞추어 '형식'과 '방법'대로만 행하면 그저 구원을 얻는 줄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구원은 형식과 방법 이전에 본질과 정신이 앞선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은 우선순위를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신자든 불신자든 '믿음으로 인한 삶'으로 구원을 얻는다. 특히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많은 이들이 로마서를 가리켜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 칭의 교리'를 강조하는 성경이라고 말한다. 물론 맞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다. 그저 로마서를 하나의 교리서나 신학 책 정도로 이해하려고 한다. 때문에 종종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강조점이 다르다는 말들을 하곤 한다. 로마서는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둘 다 믿음과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구원(믿음)이란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믿는다면 '행위' 곧 '삶'은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삶'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그저 종교적인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난 기도합니다. 난 전도합니다. 난 성가대를 합니다. 난 차량 봉사를 합니다. 난 반주자로 헌신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하게 해야 할 사명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보편적인 삶이란 종교적인 행위를 넘어선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율법을 행하는 자'란 '종교적인 행위'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사람들은 '신앙생활'하면 '종교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신앙생활은 예배당을 떠나서 소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약점이 무엇인가? '신앙 따로 삶 따로'의 삶이 가장 큰 문제다. 그저 정해진 예배 시간에 예배당 안에서만 정답을 이야기하고, 아멘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삶의 현장 속에서의 적용이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운전하며 날마다 기도해요, 제 차에는 찬양 테이프가 실려 있어요, 직장에서 믿는 사람들끼리 셀 모임을 하고 있어요."
물론 좋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은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원리와 원칙, 매너와 교양, 상식과 질서, 인격과 성품, 진리에 입각한 삶 등으로 세상을 섬기는 사역에 매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좀 더 나아가 깊은 이야기를 한다면 '교회 공동체'는 사실 '교회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지 교회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부모 자식의 비유와도 같다. 부모는 부모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하지만 사실은 자녀를 위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동동체도 그렇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현 시대의 교회의 구조는 교회만을 위해서 존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교회 공동체의 사명, 곧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바로 그 삶이란 앞서 언급했듯이 종교적인 차원의 경건 생활을 넘어서서 세상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기독교의 진리는 그저 우스운 모양새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진리에 기초한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한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16절)
1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내 복음'에라고 언급을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내 복음'이란 사도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을 의미하는데, 당시에는 '거짓 복음' 곧 이단적인 성향의 복음들이 난무하였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진리에 기초한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나아가 이와 같은 진리에 기초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무엇보다 오늘날 이 시대 역시도 거짓 복음이 신자와 불신자를 미혹하고 있다. 종종 우리는 '거짓 복음'이라 하면 한기총이나 각 교단에서 인정한 이단과 사이비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거짓 복음이란 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즉 어떠한 교단이나 교파에 속했다는 것 자체가 이단과 사이비를 보장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이 말하는 거짓 복음이란 '계속적인 자기 성찰'과 '자기반성'이 없이 인본주의로 흘러가는 교회 공동체까지 내포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타락이 왜 시작되는지 아는가? 바로 긴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그저 율법과 형식으로 예배를 이끌어 가고,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진리에 대한 긴장성이 사라지는 그 순간 교회 공동체는 정체하거나, 아니면 점점 더 나약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계속적으로 교회 공동체는 계시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점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교회 공동체는 성경보다는 교회 공동체 자체가 더 우위를 차지하게 되어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저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가 이와 같은 교회 공동체가 아니길 기도할 뿐이다.
교회사를 공부해 보면 오늘날 개신교의 교회사관은 가톨릭의 교회사관과 너무나도 닮아 있음을 보게 된다. 즉 로마 가톨릭은 교회가 성경을 결정하고, 성경 말씀을 있게 했다고 본다. 때문에 로마 가톨릭에서는 '교회'가 '말씀'보다 우위권을 차지한다. 그러나 개신교의 입장은 다르다. 개신교는 그 어떠한 지상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설 수 없음을 지향한다. 다시 말해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아래서 언제나 개혁되고,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개혁 교회'의 모토는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가 아닌가?
즉 결코 교회 공동체는 누군가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리에 기초한 복음이 말하는 교회론이요,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이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즉 그 어떠한 교회 공동체, 나아가 그 어떠한 그리스도인들도 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진리에 기초한 복음'을 강조한 이유다.
사실 이단, 사이비에 속한 이들 역시도 자신들은 구원을 받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어떠한 면에서 우리들보다 믿음이 좋다. 그러나 그들의 앞날은 심판이요, 멸망임을 우리들은 잘 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의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는 어떠한지? 나아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작업을 하지 아니하고 긴장이 풀어진 채, 그저 안주하는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그때부터 교회 공동체는 더 이상 고인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때문에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2장 9~16절을 통해 구원의 본질과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원이란 방법론, 곧 어떠한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본질을 추구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인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형식과 방법을 넘어서서 구원의 정신과 본질을 붙잡고, 진리에 기초한 복음을 풍성히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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