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의심받는 하나님의 사랑 / 말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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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 1:1-5 제목: 의심받는 하나님의 사랑 I. 말라시서 배경사 이스라엘 회복기의 역사적 면모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死後)에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북쪽의 열 지파는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남쪽의 두 지파, 곧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는 유다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은 좀 일찍 망했습니다.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란 나라에게 망했습니다. 그래서 일찍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남쪽 유다가 남았는데 남쪽 유다도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했습니다. 바벨론은 지금의 후세인이 있는 이라크입니다. 그 지방에 있던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와서 유다를 무너뜨리고 그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게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지금의 이란 쪽에 있는 왕조가 힘을 얻게 되어 바벨론을 멸망시켰습니다. 이 이란은 페르시아입니다. 성경에는 바사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라크와 이란은 요즘에만 싸우는 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부터 대단하게 싸움을 벌이던 나라들입니다. 그런데 이라크, 곧 바벨론이 무너지고 이란이 정권을 잡고 난 다음에 이란 왕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을 본토로 돌려보 냈습니다. 이때 돌아왔던 사람들의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였습니다. 에스라서를 보면,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42,360명이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돌아와서 제일 먼저 무너졌던 성전을 건축하려고 기초를 쌓고 제단을 재건하는 일부터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변의 사마리아 백성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성전 재건하는 일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긴 돌아왔지만 새롭게 성전 건축하는 일을 게을리 했습니다. 이 모습에 화가 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본토에 돌아왔으면 빨리 성전부터 지어야 한다"며 불같이 말씀을 증거했던 선지자가 두 명이 있었는데 바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학개서 1장 을 보면 학개 선지자는 "너희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너희가 자기 집만 지으려고 바쁘고 하나님의 성전은 피폐한 상태로 놔두느냐"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온 지 16년 동안 방치해 둔 성전을 재건하자고 외친 선지자가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학개와 스가랴 시대 때 예루살렘 성전이 완성되었습니다. 물론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이 완성되고 난 뒤에 문제가 또 생겼습니다. 젊은 사람을 중심으로 믿음이 식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짓긴 지었지만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나태한 예배를 드리고 무기력한 신앙 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또다시 신앙이 무너졌을 때 두번째 불을 붙여 준 사람이 바로 말라기 선지자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매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환성되었지만 백성들은 환성된 그 성전 속에서 마음의 불이 꺼진 채 식은 가슴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중거재서 다시금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이라고 말했던 선지자가 말라기 선지자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어떻습니까? 우리 한국 교회 역사를 따져 보면 1970년대는 아마도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가 외쳤던 시대와 유사할 것입니다. 1970년대에는 한국 교회에 대단한 건축 붐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들은 그때 다 지어졌습니다. 1970년, 80년대에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까? 교회에 되-이기만 하면 건축, 건축 헌금하며 열심히 교회를 지어 대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남산에 올라가 보면 큰 건물 중에 상당히 많은 건물이 교회 건물인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건물은 아름답게 지어 놓았는데 그 속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의 신앙이 다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식은 가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이렇게 외적인 것은 갖추어졌지만 신앙이 나태해지고 형식적이 되고 무기력해 진 사람들의 심령에 불을 붙일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심령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 부름 받은 선지자, 그 사람이 말라기였습니다. 우리도 심령에 불이 붙는 성도가 되어 마지막 매에 불타는 심령을 가지고 맡은 죽어 가는 영흔을 살리기 바랍니다. 말라기 시대 상황과 우리 상황이 무척 유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라기서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인 줄 깨닫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II. 들어가는 말 말라기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보면, 성전을 다 건축하고 난 다음에 이제는 나태함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말1: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요? 무슨 소리입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데 그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축복을 해줘야 할 것 아니냐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젊은 사람들에겐 과거에 무슨 체험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바벨론에 있을 때 영광스러운 일을 다 보았습니다. 대단한 문화, 부유한 삶 등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돌아와 보니까 하나님이 축복해 준다고 하시고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모든 상황이 바벨론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바벨론이 훨씬 더 잘살지 않느냐, 하나님이 무슨 축복을 해줬느냐, 우리를 여기까지 끌어다가 이렇게 고생만 시키느냐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시냐, 이렇게 돌아와서도 물질적으로 바벨론보다 더 부유하게 해주지 않고 가난하게 해 놓으시냐?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섞인 자세였습니다.
명심히십시오 우리들의 신앙이 무너졌다는 가장 큰 중거가 무엇이겠습니까-내 믿음이 무너진 증거는 감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입술과 삶에서 감사가 사라졌을 매는 "내 신앙이 무너졌구나"하고 이해하면 정확합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항상 불평 불만거리를 찾습니다. 모든 것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인 말들이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비가 왔을때 하나님이 비를 주셔서 곡식이 잘 자라겠구나 하고 감사를 하지만, 감사가 없는 부정적인 사람은 오늘 비가 오니까 땅이 질겠구나 하고 불평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포도를 먹으면서 맛도 좋고 비타민도 많은 과일이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부정적인 사람은 포도는 씨가 많아 귀찮은 과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각이 다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장미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지만 부정적인 사람은 가시가 많아 틀렸다고 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국화꽃을 보고 아름답다롸 하는데 부정적인 사람은 쑥냄새가 나서 틀렸다고 합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혼자 사는 어떤 분이 스물두 살 난 외동아들을 잃었습니다. 딸도 없고 아들 하나인데 갑자기 사과로 죽었습니다. 얼마나 큰 슬픔입니까? 그런데 이 분이 그 사실을 놓고 감사했습니다. 감사의 의미를 세 가지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하시는 것이 감동적입니다. 첫번째는 하나님께서 외로운 나에게 아들을 주셔서 22년 동안 함께 살게 해주신 것을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내가 데리친 있는 것도 좋지만 내 아들을 더 좋은 곳인 천국에 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 감사한 것입니다. 세번째는 이제야 비로소 독생자를 주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독생자를 줬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내가 이제야 뼈저리게 느꼈다는 것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 같으면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할 것 같은데 스물두 살 난 외동아들을 빼앗겼던 사람에게서 이렇게 감사의 제목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 위에 굳건히 선 성도의 모습입니다. 항상 모든 부분에서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의사였던 데이빗 클링크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경과민증 환자 1,000명을 조사했더니 그들 가운데 95%가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였다 하면 다 그 사람을 비판하고 누구 욕하고 누구 걸고 넘어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신경과민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날마다 감사하면 삶 가운데서 모든 문제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오늘도 기도함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고 입술로 감사드리고 찬양으로 감사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위기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럼 앞에 감사가 싹 사라겼습니다. 하나텀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였더니 -언제 우리를 사랑했습니까? 어떻게 사랑했습니까?하는 불평 불만으로 대꾸했습니다.
III.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부담 이러한 모습들을 보고 이 말라기 선지자가 마음 가운데 큰 부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말 1:1)에서 "경고"의 원어 뜻은 "짐"입니다.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짐이라는 것입니다. 또다른 말로하면 "부담"이라 하겠습니다.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고 마음 가운데 짐을 느꼈습니다. 부담을 느꼈습니다. 선지자만이 느낄 수 있는 아픔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깨달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거룩한 부담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우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미래를 아는 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부담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아덴 곧 아테네에 가서 우상 숭배가 만연한 것을 보고 마음 가운데 부담을 느겼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이럴 수 있느냐" 하는 마음의 부담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선지자가 경고하는 내용은 부담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 망할 자들이다" 하는 부담감을 가지고 경고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할 줄 압니다. 우리는 그냥 편히 잘 수 없습니다. 오늘도 내가 잠자리에 들 때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까? 내가 증거하지 아 니하고 내가 말씀을 외치지 아니하면 이 민족과 사회가 넘어지지 않습니까? 그러한 부담감을 가지고 날마다 말씀을 증거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나는 빛진 자라"고 했습니다. 빛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부담을 가지과, 다리 뻗고 자지 못하고 사회와 민족에 대해 책임을 지고 말씀 증거할 수 있는 마음, 이 말라기의 마음이 오늘 .우리의 심령 가운데 임하기를 바랍니다. 말라기는 이러한 부담감을 가지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열 사람이 있으면 오순절과 같이 열 사람 모두에게 성령을 부어 전부 다 변화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성경을 보면 99%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는 한 사람을 먼저 택하셔서 그 한 사람의 마음 가운데 성령으로 불을 질러 놓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깨닫고 난 다음에 밖에 나가서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다! 우리가 다시금 깨어나야 한다. 변화받아야 한다"면서 불을 붙이고 다닙니다. 한 사람의 심령의 불이 옆 사람에게로 번져 나갑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불이 붙고 그들이 또 나가서 복음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주변 전체를 다 뒤집어엎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불은 항상 한 사람의 가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의 변화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불을 말라기 선지자에게 제일 먼저 붙여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라기 선지자의 마음에 불이 붙어서 마음에 부담감을 가지고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여 주변의 맡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를 사랑하셔서 이 한국 교회를 통하여 세계를 변화시키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한 교회를 선택하여 복음으로 뜨겁게 만드시고 선교의 열정으로 변화시키는 모습, 그래서 이 한 교회의 모습이 많은 교회에 확산되고 결국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수련회 때에 촛불 점화식 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목사가 초에 불을 붙여서 옆 사람에게 불을 붙입니다. 옆 사람은 그 옆 사람에게, 이렇게 계속해서 붙이다 보면 처음에 하나였던 불이 나중에는 전체에게 붙습니다. 참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심령의 상태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불이 옆 사람에게 전달되고 또 전달되어서 전체에 다 퍼지는 역사,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부흥의 방법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이러한 점화의 첫번째 역사가 나에게서부터 시작되게 해 달라진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렇게 말라기 선지자 한 사람을 통해서, 그의 경고를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다 변화받게 되었습니다.
IV. 하나님의 반박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반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변증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2, 3절). 이 내용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의 예를 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신 결과를 보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백성인 너희들은 여러 가지 시험도 있었고 포로가 되고 어려움도 겪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지 않았느냐. 여전히 나의 보호 가운데 살아남지 않았느냐. 반면 에서는 어떻게 되 었느냐. 혼자 열심히 뛰어다녔고 잘되는 것 같았지만 지금 와서 보니까 완전히 황폐한 모습이 되었다."
순간순간의 모습을 볼 때 에서가 더 번창하는 것같이 보였지만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매는 지금 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꺼져 가는 불꽃 같았지만, 꺼질 듯 말 듯 했지만 여전히 나의 보호 가운데서 지금까지 살아 있지 않느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았느냐. 에서 민족은 다 망했지만 너희는 포로 가운데서도 건재했고 지금도 보호받고 있지 않느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느냐 안 사랑하느냐. 역사를 통해서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논지였습니다.
하나님 없는 백성은 잠시 잠깐으로 볼 때는 우리보다 앞서 가는 것 같습니다. 주일에 우리는 돈 안 벌고 그들은 법니다. 우리는 손해 보는 것 같고 예수 안 믿는 자는 금방 앞서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 안 믿는 자들은 여러 가지 여가를 즐기는데 우리는 여가도 안 즐기고 매일 교회에 앉아 기도하고 찬송만 합니다. 바보 같지 않습니까? 뒤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은 주일에도 열심히 공부해서 앞서가는 것 같고 .우리는 교회에서 찬송만 부르니 공부도 뒤지는 것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볼 때는 우리가 뒤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크게 확장해서 보면 그들은 다 망하지만 믿는 자들은 여전히 남아서 전진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쉽게 예증을 들어 보겠습니다. 해외 토픽에 실린 기사인데 몇 년 전에 알프스에서 어떤 한 사람이 길을 잃었습니다. 13일 동안 헤매다가 구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13일 동안 얼어 죽지 않으려고 단 두 시간만 자고 계속 걸었답니다. 13일 동안 걸었으니 얼마나 많은 거리를 걸었겠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그 걸었던 길을 추적해 보니까 반경 6km내를 뱅뱅 돌았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계속해서 전진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반경 61km내에서 제자리를 뱅뱅 돈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윤형(輪型)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실험을 해보면 그렇습니다. 아무나 학교 운동장에 데려다 놓고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걷게 하면 사람은 직선으로 걷는다고 하지만 10m는 직선으로 갈지 몰라도 2om, 30m, 100m쯤 걷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원을 그리고 있답니다. 자기는 직선으로 가고 있다고 하는데 100m, 200m걸으면서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전진한다고 전진합니다. 전진하지만 크게 보면 제자리 걸음입니다. 반면에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습니까-느린 것 같습니다. 바보 같습니다. 답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고 가다 보면 전진하는 인생이 됩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이것을 믿고 순종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믿지 않는 백성이 전진한다고 하는데 전진했느냐? 그렇지 않다. 뱅뱅 돌다가 망했다. 반면에 너희는 어떻느냐? 어떤 때는 시험이 있고 낙심이 있고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전진하지 않았느냐? 교회를 돌이켜 보십시오.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어폐가 좀 있지만 잠못자가면서 날마다 모여서 기도하고 여가도 없이 시간 다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성장이 있지 않았습니까. 가정을 돌이켜 보세요. 작년 재작년에 비해서 축복이 있지 않았습니까? 개인의 믿음에 성장이 있지 않았습니까? 모든 일들이 다 풀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인 줄 믿기 바랍니다. 반면에 내 뜻대로 막 뛰어다녔다면 전진한 것 같았지만 결국은 제자리를 뱅뱅 도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똑같은 예를 한 가지 더 들어 본다면, 십일조 하지 않으면 부자될 것 같지요? 어떤 사람이 저한테 와서 "내가 십 년 동안 십일조 한 통계를 보니까 수천만 원이 되던데 그것 다 모아 놓고 증권 투자를 했으면 몇 억 부자가 됐을 텐데. 내가 예수 믿어 가지고 억대 부자 못 됐다"고 농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순종했으니까 그 정도라도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십일조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중에 보면 어떻습니까? 똑같거나 우리보다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은 것은 병원비로 나가고 남에게 속아서 나가고 사고로 나가고 결국은 다 나갑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만 우리 삶이 온전하게 됩니다. 우리 삶의 전진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임을 믿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역사적 예증처럼 에서의 길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야곱의 길을 붙들기 바랍니다. V. 성도의 강건의 원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징계해야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을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자는 징계한다는 것입니다. 징계하기 때문에 아들입니다. 징계하지 않는 것은 아들로 대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못될 때 아들이니까 때려서 올바르게 돌아오게 하는거지 모르는 사람이면 무슨 짓을 하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고 아들이기 때문에 붙들어 두는 것입니다.
열매를 거두려고 하니까 포도나무를 전지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가지를 잘라 냅니다. 반면에 들에 피는 들꽃, 엉겅퀴를 전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잡초는 그냥 자라도록 내버려 둡니다. 어차피 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잡초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는 귀중한 포도나무로 보십니다. 그러니까 열매 맺으라고 잘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라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열매도 못 맺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기 가지를 자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전혀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쓸데없는 것은 다 잘라 주고 막아 주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볼 때 잘라 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지 못하는 것은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다들 굉장히 바쁘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바쁜지 써내라고 하면 하나같이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가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쓸데없는 일 하느라고 시간 다 보냅니다. 정말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삶에서 쓸데없는 가지를 잘라 내는 훈련을 하기 바랍니다. 스스로 잘라 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잘라 내실 것입니다. 쓸데없는 가지 잘라 내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일에 집중할 때 하나님께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왜 우리가 불안해집니까?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큰 확신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존 밴턴이라는 원로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영적 문제들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37절을 보십시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찬양, 이 고백들이 입에서 술술 나오는 분이 있다면 마귀가 손도 못 댈 것입니다. 반드시 이것을 암송하여 마귀가 시험을 주고 확신을 흔들 때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VI. 에돔 족속의 저항 이렇게 하나님께서 에서를 벌하시고 야곱을 사랑한다고 했더니만 에돔이 뭐라고 했습니까? 에돔은 에서 민족을 말합니다. 4절부터 보겠습니다.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느니라"는 말을 의지하여 내 힘으로 한번 살아 보겠다 하고 어금니를 팍 깨물고 사는 사람들은 이 애돔 민족과 같은 자세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에돔 민족과 똑같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을 바에는 내 주먹을 믿으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자세가 이 에돔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누구입니까? “「내가」 쌓으리 라." 이 안에 바벨탑의 신조가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쌓아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만군의 여호와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는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가 에돔과 마찬가지로 "내가 쌓겠다 쌓겠다" 해도 주님께서 뭐라고 하신다고요? 「너희가 쌓겠다고 하더라도 내가 헐리라.」 하나님을 대적할 때는 다 망한다는 얘기입니다. 당신은 믿습니까? 헛된 것을 기도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주께로 돌아오라고 외칠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야만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악물고 내가 부흥시키리라 한다고 해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세워 주실 때는 결코 건드릴 자가 없다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이 본문 말씀에 해당되는 말씀이 시편 127편 1, 2절입니다. "여호와게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오늘도 기도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는 축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는 줄 압니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이 주님이 주신 선물임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않았던 우리들을 용서하옵소서. 감사는 더 많은 축복을 위한 통로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심령에서 감사가 넘치게 하옵소서. 지금도 처처에서 상한 영의 탄식 소리가 들려옵니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이고 있습니다. 죽어 가는 영혼들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가지게 해주시고, 이들의 영혼을 살리는 데 생명 바쳐 헌신하는 주님의 도구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멸망하는 예루살렘을 향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면서 울 수 있는 눈물을 허락하시고, 이 눈물이 영혼으로 변화되게 축독하옵소서. 에서의 길을 걷는 자들은 우리보다 앞서 보이고, 우리보다 지혜로워 보이나, 결국은 방황하는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방황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전진하는 인생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한국 교회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방황하는 어리석음이 없이 젊어서부터 주께 순종하여 많은 전진이 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옵소서 인간의 힘을 의지하고, 인간의 힘을 자랑하는 모든 인본주의는 다 무너질 줄로 확신합니다. 에서의 큰소리가 피눈물로 변화될 줄로 확신합니다. 어금니를 물기보다는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무릎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는 시편 127편 22절 말씀이 평생 우리의 고백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