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도 로마서 12:1-2 글/ 하원식 목사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지난 120년의 개신교 역사 가운데 가장 위기적 상황을 맞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 피차간에 실망스런 모습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교회마다 찬송 소리, 기도 소리는 높으나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는 신자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로마서를 둘로 나눈다면 오늘 본문의 내용이 분수령이 된다고 할 수 있다. 1~11장까지는 구원과 관련된 기독교 교리에 관한 주제에 대한 기록이고, 12장부터 마지막 16장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관한 주제, 곧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특별히 오늘 본문 1-2절은 그 주제에 대한 서론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서론 1-2절 부분의 핵심은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날마다 변화되어야만 한다. 만약 변화되지 않거나 변화되기를 싫어한다면 그로 말미암아 그의 삶에 실패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여 변화되는 성도는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요 세상을 변화시켜나가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http://cafe.daum.net/ilmak
1. 몸으로 드리는 예배
인도에 오랫동안 의료선교로 나가있던 선교사의 이야기다. 어느 아낙네가 자기 아이를 업고 헐레벌떡 병원으로 들어와서는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더란다. 그래서 어디가 아픈가 하고 진찰을 해 보니깐 자기 병원에서는 도저히 안 되겠고 빨리 큰 병원으로 가야만 하는 상태이더란다. 그래서 빨리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우니 서둘러서 도시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 보라고 했단다.
그랬더니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그러면 그 사이에 우리 집 소는 어떻게 하느냐"고 되묻더라는 것이다. 선교사님은 마음이 답답해서 "아니 아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인데 소가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소가 중합니까? 아이가 중합니까?" 하니 "당연히 소지요. 아이는 2-3년 후면 또 낳을 수 있지만 소는 일평생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도 사기가 어렵습니다."고 하더란다. 만약 우리는 이럴 때에 아이와 소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당연히 아이라고 하시겠지요. 하지만 그 나라 그 여인에게는 오히려 소가 더 중요시되고 있다. 인간의 생명보다도 지금 먹고사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고 구조,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돌아보면 이런 사고방식이 만연하여 아이보다도 소를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소중한 아기의 생명도 소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마저도 쉽게 세상에 내어주며 살아갈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매일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거룩한 산 제사인 영적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비난받는 이유도 이중적인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으로 드리는 예배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크게 둘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거룩하신 주님 앞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는 죄 많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능력을 덧입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다. 예배는 세상에서 오염된 우리의 영혼을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거룩하게 소성 시키는 자리다.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가슴속에 진리의 말씀을 풍성하게 채우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겠다 고백하며 결단하는 자리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예배 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삶 속에서 지속되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는 순종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다.
예배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전한 예배를 원하신다. 그래서 처음 예배 자들에게 예물 드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흠 없는 소나 양으로 드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일도 온전히 드리라고 하셨다. 예배에는 드리는 예배, 받는 예배가 있다. 예배 순서 지를 보면 드리는 순서로서는 기도 . 찬양과 찬송. 헌금이 있는가 하면, 받는 순서는 성경 봉독. 말씀. 축도가 있다. 그러기에 예배시간은 소중하다. 온전히 준비하여 드리세요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 드리며, 최상의 가치를 구별해서 드리는 것이다. 결국은 내가 죽어서 제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예배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듯이 우리의 속 사람이 변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우리의 속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며, 저주의 자식이며, 사탄의 종노릇하던 자들이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떤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도 그것은 부분적일 변화일 뿐이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다는 것은 속 사람의 변화를 말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살아 계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나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위대한 선언이 믿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한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 주신다. 성령 님을 통해 기쁨과 감격의 은혜를 주신다. 성령 님을 통해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 성령 님을 통해 사랑을 물 붓듯 부어 주셔서 사랑으로 승리하게 하신다. 이것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예수 믿는 자의 기쁨이요 행복이다. 성령 님의 다스림과 통치가운데 살아가는 성령 충만한 자만이 진정한 예배 자로 날마다 승리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음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달라진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소망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변화의 축복과 생명의 근원이 마음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남북 전쟁을 할 때인데 처음에는 남북전쟁이 그렇게 길어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막상 전쟁이 붙고 보니까 전쟁이 길어진다 말이에요. 자 이렇게 되고 보니까 하루에도 수백 명씩 같은 동족끼리 싸우면서 죽어 가는데 마음이 너무도 괴롭다. 그래서 집무실에서 하나님 앞에 두 시간씩 세 시간씩 기도한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할 때에 대통령이 기도하니까 이제 장관들도 문 앞에서 기도한다. 기도 끝나고 대통령이 나올 때에 송구한 마음으로 장관들이 각하 저희도 이 문 밖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 달라고요?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가 걱정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지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 일을 거스르는지 따르고 있는지 그것이 걱정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중입니다. 라고 말한다. 바로 이 마음 자세가 성도의 마음 자세다. 하나님이 내게 와서 내 편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하나 보다 더 내가 하나님 편에 가서 하나님 뜻을 따라가게 해 달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하나님 뜻을 우리가 따라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 갈 때가 많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변화의 요구 앞에 서 있다. 한국교회는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성장 동력을 잃어버렸다. 빠르게 변하고 있는 21세기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교회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도전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사회의 변화를 주도하기보다는 그 변화를 뒤따르지 못한 채 낡고 구태의연한 모습에 안주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호감을 잃어버리고 있다. 찾아 가보고 싶은 종교 선호도에서 불교, 천주교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오히려 신자들을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교회와 우리교회의 앞날을 내다보고 어떤 변화를 어떻게 이루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기도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약 500년 전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교회들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교황의 절대 교권주의 하에 교회의 경건은 화석처럼 굳어져만 갔다. 교회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해 면죄부라는 신앙을 빙자한 돈벌이 사업을 주님의 이름으로 행했다. 신자들은 미신적 신앙에 빠져들었고 복음의 능력은 이미 교회를 외면해 버렸다. 이 때 변해야 산다고 외치고 나선 이들이 있었다.
바로 종교개혁자들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의 반박 문을 내걸면서 그 선봉에 섰다. 이 변화의 물결이 강물처럼 온 유럽을 뒤덮기 시작했다. 새로운 신앙의 운동이 일어나 교회를 새롭게 했고, 교인들의 신앙을 다시 말씀 위에 서게 했다. 그렇다. 종교개혁자들은 변화에 성공했다. 변화해야 할 때를 정확하게 읽었고, 변화할 수 있는 힘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이기심의 노예, 탐욕의 노예로 사는 것을 말한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환상의 파랑새를 좇는 삶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만족이 없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한다. 이 세대는 안목의 정욕에 따라 산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살고 있는가? TV를 통해, 컴퓨터를 통해, 신문이나 매체를 통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것을 좇고 있다. 현란하게 포장되고 진열된 상품들이 우리의 눈을 자극한다. 선전하는 옷을 입으면 모두가 패션 모델처럼 될 것이라고 한다.
광고하는 식품을 먹으면 무병 장수할 것처럼 보인다. 선전하는 아파트에 살면 최고의 귀족이 될 것처럼 보인다. 선전하는 보험에 가입하면 모든 질병과 사고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줄 것처럼 보인다. 죄의 유혹들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내가 직접 유혹의 자리에 찾아가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것들이 안목의 정욕으로 우리를 사로잡는지 모른다. 제 컴퓨터 메일 검색을 위해 열면 별별 유혹의 글과 사진이 넘친다.
이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거나 할 수 있는 것을 자랑하는 것을 말한다. 즉 교만한 삶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이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자기를 확대 포장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자기 PR시대라고 한다. '피할 것은 적당히 피하고, 알릴 것은 적극적으로 알리라'는 것이다. 그것을 개성이니 자신감이니 라는 단어로 포장을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과학기술과 문명으로 신적인 경지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 얼마든지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생의 자랑에 빠져있는 이 세상의 모습이다. 결국 "이 세대"는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 자신을 올려놓고 스스로 하나님 행세를 하는 것을 말한다.
삶의 중심에 자아가 차지하고 있기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본받다'는 말은 '모델을 삼다, 혹은 '순응하다/일치시키다'는 의미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세상을 모델로 삼고, 세상의 가치에 자신을 순응시키면 그것은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없다. 성도는 세상에서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의 한 복판에 서 있다. 우리는 세상 한 가운데 있지만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거슬러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이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목적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더 이상의 육신의 정욕이 아니라 나눔과 섬김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더 이상 안목의 정욕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는 영적 안목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더 이상 이생의 자랑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며 사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갱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은혜를 받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 매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 자로서의 갱신이 필요하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령 충만을 날마다 구해야 한다. 성령 님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다스리시도록 믿음을 구해야 한다. 끊임없는 자기갱신과 신앙의 노력이 없이는 세상 속에 여전히 휩쓸릴 수밖에 없다.
왜 오늘날 많은 부정과 불의한 사건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연루되어 있는가? 참된 예배 자로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닷물은 2.65%의 염분으로 썩는 것을 막는다. 그런데 왜 이 땅에 5만개가 넘는 교회의 십자가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천만명의 넘는 성도들이 살고 있는데 이 민족은 갈수록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는가?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강단에 서 있는 목사의 잘못이다. 모든 중직 자들의 잘못이요, 성도들의 잘못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친다면 분명히 이 민족은 소망이 있다. 교회는 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다. 이 시대를 살리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우리 참빛 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 원한다. 우리 참빛 교회가 바로 그 사명을 이룰 수 있기를 원한다.
얼른 보면 둘 다 비슷하다. 두 가지 모두 온도를 다루는 계기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온도계는 온도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온도 조절기는 온도를 원하는 상태로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다. 우리 모든 예배 자들은 세상의 유행이나 풍속을 좇는 온도계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죄와 유혹이 많은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정직한 정비사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변혁시켜 나가는 온도 조절기가 되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따라 오도록 해야 한다. 오늘 얼마나 많은 일들이 성경 적 가치와 위배된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일천 만 명의 성도들이 그대로 세상을 본받고 있기에 기독교의 문화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교회는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세상에 순응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믿음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원한다. 이것이 삶 속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다. 이제 우리의 예배는 달라져야 한다.
교회로 출발하기 전 집에서부터 시작된 예배는 예배당에서 절정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삶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교회 안에서 예배드릴 때의 모습과 삶 속에서의 모습이 일치해야 한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그러나 고인 물은 썩는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매일 매일 변화되고 성장하지 않으면 무능력해지고 세속화되고 만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맛을 잃으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밟히고 있는 실정이다. 여러분 분하지 않은가? 여러분, 부끄럽지 않는가? 정말 각성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말씀을 가까이 하라. 모이기를 힘쓰라. 그리고 옛사람의 습관들을 과감히 버리라. 그리고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리고 내 자신이 세상을 변화시킬 변화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인식하라. 우리가 성도다움을 회복할 때 심령의 부흥과 삶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시대의 유일한 소망은 오직 예수, 오직 교회라고 믿는다.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가졌던 교회 사랑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불안하고 혼란한 세대 가운데 이 곳에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우리를 불러 모으셨다.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교회, 그 교회를 위해서 우리를 불러 모으셨다. 여러분, 적당한 신앙생활로는 이 사명, 이 목표를 감당할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 부족한 줄 알고, 또한 교회를 향하여 세상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댄다 해도 이것이 옳은 일이요, 사명이라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그 목표를 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반드시 이루실 줄 믿는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변화를 받아야 한다. 변화를 받아야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얍복 강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야곱이 변화되자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야곱으로 인해 동일한 은혜를 받고 있지 않은가? 모세 한 사람이 미디안 광야에서 가시덤불에서 하나님을 만나 변화를 받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지 않았는가? 무디 한 사람이 변화되자 미국이 달라지고 세계가 달라졌다. 리빙스턴이 변화되자 아프리카에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도 하나님은 칼빌과 웨슬레이와 슈바이처와 같이 성령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항상 내 안의 심령이 변화되어야 한다. 때문에 성경에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기도할 때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 마음 속에 성령의 불이 임하고, 성령의 바람이 불고, 전도의 역사가 일어났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를 받자 아시아가 변화되고, 유럽이 변화되고, 로마가 변화되었다. 우리들의 가슴에도 성령의 불이 임해야 한다.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내가 변화되면, 가정이 변화되고, 나라가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되고, 세계가 변화되는 것이다. 투루나이젼이라는 목사님이 있다. 그분이 젊은 시절에 "하나님, 저로 하여금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그는 마흔의 나이가 넘게 되었다. 그가 마흔이 넘으면서 기도를 바꾸었다. "하나님, 나를 바꿔주십시오." 그러자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의 기도는 즉시로 응답되었다. 자신이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세상이 정말 달라졌다는 것이다. 목사님은 "내가 진작부터 세계를 바꾸려고 하기 전에 나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했더라면 나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제 결심해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 것을 결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성령에 붙들린 인생이 되어 살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분별하는 것이다. 세상은 너무나도 유사품이 많이 있다. 많은 물건들이 중국산인지 한국산인지 분별이 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도 분별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입이 맛을 분별하고, 귀가 소리를 분별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은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오늘날 이런 영적인 분별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세상의 쾌락에 빠지고, 이단에 빠지고, 헛된 육체의 정욕에 빠지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