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율법을 지키고 화가난 큰아들
누가복음 15:11-32
유대인들은 왜? 율법지키기를 목숨을 걸을까?그것은 율법을 일로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잘보다 보면
품삯에 대한 것이 많이 나옵니다. 일맥만 그렇게 보이는지 모르지만 자세히 보시면 금방알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 비유들을 다 볼 수 없으나 중요한 내용들을 보면서 공부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내용을 보시면서 혹시 자기마음에 안맞는다고 욕을하지마시고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저도 사람인지라 괜한일로 낙심될때가 있고 어느때는 자료를 만들기 싫어질때도 있기에 미리 알려드립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맏아들에 해당되는 구절을 보겠습니다.
언뜻 맏아들은 집을 나가지도 않았고 아버지 명을 잘 따랐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아들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경우도 맏아들이 아버지가 둘째를 위해 잔치를 벌리는 것을 보고 흔한 심통을 부린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그의 행동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동생을 너그럽게 용서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그렇게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비유에서 맏아들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의 계보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준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비유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맏아들의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까닭은 자신의 믿음이 맏아들과 같은 패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 둘째 아들과 율법을 지킴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함을 받으려는 맏아들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두 아들의 대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가 무엇인지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맏아들과 같이 자기 의를 세우기에 열심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롬 10:2-3]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맏아들은 집을 나가지도 않았고, 아버지 명을 어김없이 지켰습니다. 이것이 곧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라는 로마서의 말입니다. 결국 맏아들은 자기식 의에 집착한 나머지 불행한 결과를 맞게 되었습니다. 불행한 결과란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 화가 난 맏아들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집에 돌아 온 맏아들은 둘째를 위해서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이는 것을 보고는 몹시 성질이 났습니다. 자기는 집에 남아서 착실하게 일만했는데도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 주지 않더니,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 온 동생을 위해서는 큰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철저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그래서 몹시 화가 났습니다. 누구라도 맏아들과 같은 입장에 처한다면 화를 낼 것입니다. 맏아들의 화는 당연합니다.
우리는 화 내는 것 자체를 악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연스러운 감정 중에는 화를 내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 자체로 악할 수는 없습니다. 실상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 아비 마귀에서 난 자, 평토장한 무덤'이라는 격한 표현을 썼고, 또한 사도 바울도 시편을 인용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라는 표현을 했던 것을 봅니다. 이런 말들은 화가 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이 이렇게 화를 냈다고 해서 그들을 나쁘다 또는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의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화는 어떤 사람이 내느냐에 따라서 선하기도 하고 또한 악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맏아들이 화를 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문제는 가장인 아버지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에 화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결정에 화가 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 집에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도 맏아들이 아버지의 결정에 화를 내게 되니까 아버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집 밖에서 서성거려야 했습니다. 그가 동생을 대하는 마음과 아버지가 동생을 대하는 마음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만일 그가 동생을 대하는 마음이 아버지의 것과 같았다면 그렇게 화를 내고 집 밖에 서성거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함께 잔치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집에 함께 거할 수 있으려면 아버지와 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 맏아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우리
우리는 이런 맏아들에 관한 깊은 생각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화나는 감정을 억제하고 사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맏아들로서 동생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이해하자, 암, 당연히 그래야지…." 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삭이는 행동이 곧 믿음이요 순종이라고 이해를 합니다.물론 그렇게 참고 억제한 것에 대한 보상을 나중에 천국에서 받는다던가 아니면 언젠가는 복으로 되돌려 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에서 그렇게 경계하는 자기 의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무모한 시도인 것입니다.
왜 이런 시도가 계속되는가 하면, '탕자의 삶'을 살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예수께 달려 와서 충성을 맹세하는 식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게 되면, 결국 하나님 앞에 내 놓는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계명에 따라 주일마다 교회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을 드렸고, 봉사했고, 금식했고, 구제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말들은 곧 지금 맏아들이 하고 있는 말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또한 맏아들과 같은 본질의 바리새인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눅18:11-12]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종합하면, 맏아들과 바리새인들은 한결같이 ‘나는 무언가 했다!’는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율법적 믿음의 표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지키는 것이 일하는 것이 었습니다.그래서 삯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다 지키고나면 영생을 얻은줄알고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합니다.
"그럼 십일조, 헌금, 구제, 봉사, 금식할 필요 없고, 토색, 불의, 간음해도 괜찮다는 말이냐?"
이런 반문은 자신이 맏아들 또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맏아들과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문제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십일조를 하면 자기 의로 남게 되고, 안하면 교회 나오지 않는 불신자와 똑같아져 신자라는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십일조를 해도 문제요 안 해도 문제입니다. 자신의 믿음도 이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오려는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의 자리에서 나와 둘째 아들의 자리에 서게 되면 십일조, 구제, 헌금, 봉사 등에 관해서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면 하고 안하면 안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맏아들이 둘째 아들의 행동을 해서 둘째 아들의 자리에 있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로 옮겨 가야 합니다.
- 바리새인이란 ?
지금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상 받을 무언가를 했다는 식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일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런 신앙이 바리새인식 신앙입니다. 성경의 바리새인은 옛날 예수시대를 살았던 유대인의 한 부류(部類)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고유명사는 본질적으로 같은 행동을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총칭하는 보통명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를 믿되 바리새인식으로 믿는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바리새인식 믿음을 가진 자들의 본보기입니다. 맏아들은 둘째 아들과 같이 참다운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런 노력과 수고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잔뜩 보상 받을 기대로 그날그날을 살아가고 있던 그에게 심판의 날이 다가 왔습니다.
그 날은 둘째가 집에 돌아 오는 날이었습니다. 둘째가 돌아 오는 날 맏아들은 오히려 집 밖에서 서성거리게 되는 웃지 못 할 일이 발생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그동안 쌓아 놓았던 자기 의 때문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쌓았던 자기 의 때문에 집 밖으로 내 몰리게 된 형국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입니다.
우리도 참다운 회개 없이 예수를 믿으면 필연적으로 맏아들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자신들이 맏아들과 같은 신앙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처음 나올 때 이미 예수를 주로 시인했고, 그때 거듭났으며, 이제 죽으면 천국 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주위 교인들도 그렇다고 확인을 해 주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자신은 이미 예수 편에 서기 합당한 사람이 되었고 남은 것은 이제 주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서 천국에서의 상급을 받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맏아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어 주신 것은 우리가 이렇게 맏아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바로 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비유를 제대로 읽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 집 안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맏아들
우리는 심판 때 하나님께서 착한 일을 한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고 악한 짓을 한 사람들은 저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밀어 넣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국에 입장할 사람의 숫자와 자격을 제한하지 않으시고 또한 특정한 누구를 지옥으로 밀어 넣지도 않으십니다. 단지 각자가 자신이 원했던 곳으로 갈 뿐입니다.
한 예를 들면, 저는 젊었을 때 즐겨 들었던 그런 노래들을 좋아합니다. 윤형주, 양희은, 송창식, 김세환 같은 가수들이 활동하던 그 시절의 노래들을 들을 때 마음이 편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유행하는 GOD나 그와 유사한 젊은 댄스 가수들의 노래는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콘서트가 있다면 저는 윤형주나 양희은의 콘서트를 가지, 무료 초청장이 와도 GOD의 공연에는 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젊은 가수들의 음악이 제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GOD공연장에는 그들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모이게 되고, 윤형주의 콘서트에는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는 원리입니다.
지금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잔치에 참여하기를 간곡하게 권합니다. 그러나 이 맏아들은 집 안에 들어가기가 싫습니다. 들어가 보았자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귀여워해 주는 것을 참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그래서 이 맏아들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밖에 있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이 아버지는 하나님의 상징입니다. 천국이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어 누구나 들어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 문이 열려 있으니 모두 들어와서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하십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하나님이 싫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오라고 아무리 간절히 권해도 그들은 천국 바깥 어두운 데가 마음이 편하고 좋습니다. 여기 맏아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천국이 체질에 맞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고, 지옥이 체질에 맞는 사람은 지옥을 선호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체질인 사람이 억지로 참고 천국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체질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맏아들이 자신의 화를 참고 억지로 안에 들어가 잔치에 참여한다 해도 마음의 괴로움으로 인하여 견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맏아들도 탕자가 되어야…
그럼 무엇이 해결책일까요? 맏아들의 근본 문제는 집을 나갔던 경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아버지 명을 따르고 잘 지킨다 해도 아버지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화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와 영원히 살 수 있으려면 그도 둘째 아들처럼 먼 나라에 가서 나름대로의 독립된 삶을 살다가 회개하고 돌아 와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면 그는 아버지가 탕자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맏아들은 곧 율법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입니다. 맏아들도 먼 나라에 가야 한다는 의미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사실상 하나님을 떠난 먼 나라의 생활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있는 둘째 아들들입니다. 이제 참다운 회개를 하게 되면 예수를 만나 아버지 집인 천국에 영원토록 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릇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지금 참다운 회개를 해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의 상징이고, 둘째 아들은 복음 아래 있는 자의 상징입니다. 자신의 안이한 생각과 달리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맏아들과 같이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위 내용은 무릎치며 읽는 성경(저자:정덕영)에 있는 내용을 일부 참조 하였습니다. 회개란 눈물 흘리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복음으로 돌아와 보면,
아침 일찍 나온 일꾼들이나 저녁 다섯 시에 나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들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일찍 온 일꾼들이 데모를 합니다.우린 더 줘야 될 것이 아니냐? 요약을 하면 아침 일찍 온 일꾼은 유대인이고 늦게 온 일꾼은 이방인입니다.다른 말로 하면 아침 일찍 온 일꾼들은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이고 늦게 온 일꾼은 그 당시 손가락질을 받았던 세리요, 창녀요, 죄인들입니다.또 다른 말로 하면 아침 일찍 온 일꾼들은 일찍 세례 받은 자들이요,늦게 온 일꾼들은 늦게 세례 받은 자들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아침 일찍 온 일꾼들은 머릿속에만 하나님이 있는 종교인이요, 늦게 온 일꾼들은 행동으로 보이는 신앙인이 아닌가?오늘 복음을 조금 이해하려면 팔레스타인의 농사하는 방법을 우리들이 알아야 됩니다.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9월이 되면 포도를 수확하게 됩니다.이때가 되면 장마가 시작되기 때문에 포도를 제때 거둬들이지 못하면 그해 수확은 망치게 됩니다.포도를 늦지 않게 거둬들이기 위해서는 급하게 서둘러야하는데 비록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할 사람이라도 주인들은 서로 다투어서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팔레스타인의 농사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이상한 일은 아침에 일찍 와서 하루 종일 수고한자나 저녁에 늦게 와서 한 시간을 일한 자나 주인으로부터 받은 품삯이 똑같다는 겁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확실히 불공평합니다.그러기에 일꾼들의 불평도 대단합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릅니다.세상의 눈으로는 주인의 처사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인은 일을 확실하고 선하게 처리했습니다.
다른 이의 품삯을, 아침 일찍 온 자의 품삯을 깍지도 않았고, 다만 늦게 온 자들에게 하루품삯을 넉넉히 주었을 뿐입니다.
정의에 어긋난 것은 없습니다.어찌 보면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일한 자가 자기들이 고집을 부려서 늦게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몰라서 못 왔고 일을 시켜주지 않으니까 하고 싶어도 올 수가 없었던 겁니다.‘오후 다섯 시까지 누가 마지막이라도 나를 불러주지 않나~’ 하고 기다렸던 이 자의 삶을 주인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한 시간의 품삯밖에 주지 않는다면 그들 식구는 분명히 오늘밤은 굶어야 됩니다.주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중에 일한 사람에게도 후한 처사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일꾼들은 노예나 종이 아닙니다.사실 그 당시에 노예나 종은 굶어죽을 염려는 없었습니다.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하급 노동자들, 천한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만 되는 그러한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시기에 인간의 머리로는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핏값으로 산 바된 이방인 입니다. 우리는 값을 미리다 받아서 쓴자들 입니다. 받을 것없는 자이지만 아침부터 일한 유대인들과 같이 나에게도 상급을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 감사할 뿐입니다.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