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예수를 입으로 고백만 하면 구원받느냐?
네가 만일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9)
초대교회 시대는 로마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시대였습니다. 10대 황제가 300년동안 계속 박해를 해 왔습니다. 로마는 황제를 숭배했으므로 즉 황제를 신격화 해서 황제가 아닌 그 누구에게도 주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곧 '황제(가이사) 가 주(主)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라고 부를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또 그런 있을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시인하다는 말은 고백한다. 공공연하게 외친다는 뜻인데 그때는 예수를 공공연하게 외치면 남는건 죽음 밖에 없었습니다. 병원에서도 그들만의 신을 숭배했고 학교에서도 그런것들을 가르쳤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무신론자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11:35-38)에 나오는것 처럼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명이라면 오직 믿음 잘지켜서 자손대대로 전수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주시다"라고 말한 것이 죄목이 되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짐승의 가죽에 싸서 개들에 의해 찢기우기도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혹은 화형이 되어 해진후 밤을 밝히는 일에 이용되기도 했다로 '타기투스의 연대기'중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지역만이 황제숭배가 제외되었는데 그이유는 유대인들의 신앙이 너무좋아서 막을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지역으로도 갈 수 없었습니다. 유대지역에서 부르는 주는 여호와이므로 예수를 주라고 한다면 로마지역의 박해보다 더 심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 사도가 마음으로 믿은 것을 구태여 또 입으로 시인하라고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에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지금같이 단순히 영접 기도하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만천하 사람들 앞에 공언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조롱과 멸시와 핍박이 따르더라도 예수없이는 나는 한 시도 살지 못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핍박을 넘어 순교까지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준비입니다. 쉽게 말해 공산당이 예수 믿는다는 자는 죽이겠다고 총부리를 겨누는 앞에서 “나에게는 예수 말고는 주가 없으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이 그 참 의미입니다. 결국 입술로 시인하는 것이나 마음으로 믿는 것, 둘 다 자기 생명과 예수를 맞바꾸는 것이며 또 그렇게 실제로 전 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당신의 생명과 맞바꾸어 신자를 구원해 주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과연 이런 믿음이 단순히 복음의 진리에 동의하여 결단하는 것만으로 생기겠습니까? 요컨대 총부리 앞에서 예수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담대하게 말하는 것이 잠시 생각해보고 한 번 기도한다고 쉽게 되는 있는 일입니까? 믿음이란 예수에 대한 비호감 내지 무지를 예수에 대한 호감 내지 인정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믿음이 좋은 구원 받은 신자라도 막상 총부리 앞에 서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았을 때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하나님과 등을 지고 세상의 쾌락과 죄악만 쫓던 그래서 그분과 원수 된 자가 스스로 결단하여 그분과 화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피해자인 하나님이 먼저 용서해주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놀랍게도 성경의 ‘믿어’와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 원어가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수동태란 알다시피 동작의 주체가 본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그렇게 만들어 주는 제 삼의 근본적인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인간의 마음이 먼저 바뀌어야만 믿음으로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힘에 의해 자신의 전부가 바뀌었다는 것은 본인이 의식하든 못하든 어떤 일이 자기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구원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건은 당연히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체험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지는 극적인 전환이 있습니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신령해졌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예수로 인해 이전의 나는 죽었고 이제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 오직 그분의 통치만 받기 위해 자기 전부를 그분께 내어드리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이자 끝입니다. 영원도록 변함없이 우주의 주인이시자 만물의 주관자입니다. 당연히 인간에게도 처음이자 끝으로 출생에서부터 죽음까지 그분이 주관하십니다. 구원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죄인의 외부에서부터 성령을 통해 그 죄인의 마음을 바꾸는 일을 예수님이 직접 해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그분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마음으로 믿어지는 것이며 그 후에야 예수 믿기로 결단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밖에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힘으로 산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아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있었고 순교자적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지만 그들의 삶은 100%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하나 들자면 그때 로마시대는 워낙 타락해서 처녀가 없었는데 고위관료들이 그리스도인 여자를 뒤로빼돌려 며느리를 삼았다고 합니다. 이런 박해 가운데서도 빛과 소금이 되어 로마복음화가 이루어진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불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100%신뢰할수 있습니까?
현재도 모든 세상은 '황제(가이사)=主'세상입니다. 세상의 풍조와 수많은 유혹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벗어날 길은 죽음 밖에 없습니다. 또 '가이사 = 주'세상에서 '예수 = 主'로써의 삶을 사는것은 살았으면서도 죽은 것입니다. 이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일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순교자적 마인드를 가지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통치받아 말씀대로 순결하게 살면 내가 힘을 얻어서 뭔가를 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하실 것입니다.
사장이 신입사원을 뽑는 면접에 참여해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뽑습니다. 사장이 주관적으로 볼 때, 좋은 사람입니다. 아무렇게나 뽑는 것 같지만 사장은 자신의 정해진 원칙에 의하여 사람을 뽑는 것입니다. 이걸 항의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을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가 사장이 된다면 그도 자신의 원칙에 의하여 사람을 뽑을 것입니다. 그리고 입사 지원자는 그 원칙에 의하여 탈락됩니다. 그들은 사장이 잘못된 원칙을 강요한다고 반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두 가지 원칙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둘째, 부활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 혼자 마음속으로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 앞에 고백해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에서 당신은 예수를 주로 시인해야 합니다. 둘째, 세상에서 당신은 예수를 주로 믿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하나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 형제가 됨을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불신자들에게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어떤 핍박과 고난이 닥쳐와도 자신의 정체성에 관하여 흔들리지 않는 고백입니다. 단순히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당신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입술만의 고백으로 당신의 진실성은 입증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전인격의 중심으로서 마음입니다. 또한 영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기관으로서 마음입니다. 우리는 육의 지식이나 지혜로서 이 사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을 봅니다. 이 사람들은 마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입니다. ‘너는 죄를 짓잖아? 너같이 깨끗하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어? 그것은 거짓말이야.’라고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속삭입니다. 마치 당신이 의로운 행위를 해야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죄수에게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내렸는데, 나는 아직 죄값을 치루지 않았으니까? 감옥에 더 있어야 한다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부활하심을 믿으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고백을 의로 여겨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당신이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사면의 조건에 맞았으므로 풀려난 것입니다. 물론 이런 대통령의 사면이 잘못되어 국민들이 비난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롭고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두 문장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문장입니다. 마음으로 믿으므로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믿지 않는데 시인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서 입으로 고백은 거짓입니다. 인간은 판단할 수 없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두 문장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음으로 믿는 것을 형제와 세상에 고백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서 태도입니다. 어쩌면 당신이 사람들 앞에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부활하심을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의로워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믿음의 반석위에 집을 짓습니다. 이 기초를 흔드는 것은 마귀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의 귀중한 구원을 빼앗기 위해 마귀가 유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사원으로 뽑는 것은 사장이지 당신과 함께 있는 지원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루마니아의 공산당원들이 어느 목사 한 사람을 끌어다 놓고 심한 고문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저주하라고, 신앙을 부인하라고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지독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자, 공산당원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목사의 14세 된 외아들을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고문했다. 사랑하는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자, 아버지는 참다못해 외쳤습니다. “멈추시오! 내가 예수님을 부인하겠소!” 그때 목사의 아들이 죽어 가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방금 말씀하신 것 취소하세요. 예수님을 부인하지 마세요. 저는 예수님 이름을 저주한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 바울은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하면서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을 강조한다. 무엇을 입으로 시인하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가 주님인 것’을 시인하라고 했다. 그것도 거저 머리 속에서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술로 고백하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가 주님인 것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중요한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십계명에 나오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을 따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읽을 때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여호와’라 부르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도나이’라 말하지만 ‘아도나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그들은 ‘여호와’를 생각했습니다. ‘아도나이’라는 말이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바울이 구원의 길로 제시한 것은 “예수가 곧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 로마 제국은 기독교 국이 아니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교를 믿는 것이요, 황제숭배 사상에 배치되는 것이며, 예수가 주님이다는 고백은 당시에는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 속 생각 만으로가 아니라 입술로 ‘예수가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을 시인하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요구합니다. ‘만일 예수를 믿는 신앙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내가 믿는 신앙에 대해 당당하게 입으로 시인하라.’ 여러분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