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38년이란 “죄와 방황의 숫자입니다.
38년이란 “죄와 방황의 숫자입니다.
며칠전에, 자료를 올렸습니다. 우리 회원님들이 올린 글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잘 알고 계신 목사님께서 쓰신 '베데스다 못의 38년된 병자를 고친 글'을 올렸더니 난리가 났습니다. 심지어는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면서 못할 말도 서슴없이 댓글로 써놓았습니다. 저는 이제야 한국교회 목사님들의 성경해석 실력을 감으로 잡았습니다. 이스라엘 말로 쓰였고 배경이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식으로 해석하면 이단이고, 이스라엘 배경을 무시하고 한국식으로 해석하면 영적으로 잘 해석하였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된 것입니다. 글쓰신 강문호 목사님은 매년마다 한두번씩 30여년을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랍비에게 이스라엘의 역사와 배경사와 성막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집적 배우고 오셨고, 한국에서 성막 강의는 1인자라고 자부하시는 분의 말씀인데도 "아니라"고 우기시는 목사님들을 볼때 무엇이라고 해야하는지 할 말이 생각이 안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말라기를 통해 영적 간음하는 이스라엘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400년동안 암흑기라는 시간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사가랴의 아들 세례요한이 오기까지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이상이나 선지자가 한사람도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때까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말라기에 기록된대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지않는 헛제사를 400년동안 자기들의 소견에 좋은대로 열심으로 제사를 하였습니다. 때가 되매 예수님이 오셨고, 세례요한은 이스라엘에게 주께 돌아오라(회개하라) 마귀의 새끼들아! 외치기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38년 된 병자가 오늘날 누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38년이란 “죄와 방황의 숫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생활을 하던 애굽에서 나와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란 지도자를 세우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게 하시면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를 통해 온 백성에게 "가나안땅에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들어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명령을 듣지않고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내서 탐지하고 들어가기를 청합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믿고 들어가라는 명령보다는 백성들의 말을 더 좋게 듣고 하나님께 다시 정탐군을 보내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기적으로 지켜주신 것을 못믿고 정탐을 하겠다는 것에 대해 "할테면 해 보아라"는 뜻으로 허락합니다. 이스라엘과 모세는 그곳에 들어가기에 앞서 각 지파에서 한 사람의 정탐꾼을 선발하여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서 40일 동안 그 땅을 살피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와서 그 땅을 정탐한 보고를 할 때 10명은 "그 땅의 거민이 너무 강해서 들어갈 수 없다"고 했고, 여호수아 갈렙은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요, 그 땅의 거민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믿기 보다는 들어갈 수 없다는 10명의 부정적인 보고를 한 정탐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통곡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그 땅을 정탐한 40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오는 길이 2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38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38년이란 바로 이렇게 불순종한 것에 대한 죄값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본 애굽에서 나온 일 세대가 다 죽기까지 광야를 돌게하셨고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만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에서 38년 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를 기록한 것인데 -그 베데스다 못이 어느 문 가까이에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양문이란 예루살렘 성 북쪽에 있는 문으로 지금은 스데반 문이라고 불려지는 문을 말합니다. 예전에는 금요일이면 양문 밖에서 양시장이 섰고, 또 그 곳을 통해서 양들이 성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양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와 성벽을 다시 쌓고 성문을 세울 때 제일 먼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은 성문 중에서도 제일 먼저 양문을 세운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양을 들이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성문을 세울 때 그 어떤 문보다 양문을 가장 먼저 세웠던 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 예배를 드리는 것을 가장 우선하고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8개의 성문은 자파 문(욥바), 다마스커스 문, 헤롯 문, 사자 문, 스데반 문 황금 문, 분문, 시온문입니다.
이렇게 각 문마다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사자문은 그 문에 4마리의 사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고, 헤롯문은 헤롯의 궁전으로 통하는 문이기 때문에, 분문은 똥 분자를 써서 이 문을 통해서 각종 오물들을 내다 버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8개의 성문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화려한 문은 황금 문으로 그 색이 황금색이고 화려하게 꾸며졌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우리가 보통 보는 예루살렘의 사진들은 황금 돔과 황금 문을 중심으로 찍은 것들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황금문은 두 개의 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자비의 문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회개의 문입니다. 이 문은 지금은 굳게 닫혀서 사용하지 않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도 메시야가 오시지 않은 것으로 믿고 있기에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실 때에 그 황금 문이 활짝 열릴 것이고,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이 이곳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이 땅에 임하시는 그 마지막 때에 이 황금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 성문 가까이에 있는 무덤에서부터 죽었던 영혼이 부활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이 황금 문 가까이에 묻히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황금 문 근처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건너편 황금 문이 똑바로 보이는 감람산에는 묘지들로 가득 찬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바로 모든 이 세상의 죄인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 베데스다 연못을 찾았지만 그곳에서 고침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은 곧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지로 그 못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는 자기의 힘과 의지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를 그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도 그 어떤 것도 그를 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방편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연약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것 뿐입니다. 아무도 그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이름이 없습니다.
38년 병자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치료받았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생명을 얻었습니다. 은혜의 집에서 은혜를 누리지 못하다가 자비의 아버지, 은혜의 주님을 만나고 그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38년 만에 병상에서 일어난 병자의 이야기에 연루된 말씀입니다. 38년된 병자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성안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병고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는데 놀란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법을 어기고 병자를 치료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입니다.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병을 치료하고 안식일에 침상을 들고 이동한 일에 대하여 진상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일을 만든 자는 예수라는 사실을 알고는 예수님을 핍박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마귀집단 입니다.
1. 안식을 잃은 유대인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구약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유대 랍비들이 율법 실행의 세부적인 사항을 별도로 규정해 놓은 규정서가 있습니다. 한 예가 안식일에는 천 발자국 이상 여행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짐에 대한 규정으로는 환자가 누워있는 침상을 운반할 수는 있지만, 환자가 누워있지 않은 침상은 운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층에 있는 손수건도 내려올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이들은 39가지나 되는 안식일 법 때문에 유대인들은 참 안식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들의 근시안적인 율법주의가 참 안식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편협성이 그들을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율법주의가 먼저요 사람의 생명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매로 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이들의 맹목적인 원칙과 그릇된 명분이 도리어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식을 잃어버린 세상, 곧 안식일을 잃어버린 세상 이것이 바로 화요 불행이요 심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영원한 안식의 복을 누릴 수 있었지만 안식이 없는 세상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7일 중에 하루를 안식일로 선포하시고 이 날을 거룩히 구별하셨습니다. 안식을 잃어버린 인생에게 안식을 찾아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7일 중에 하루의 안식은 영원한 안식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다만 영원한 안식의 예표가 될 뿐입니다.
관련자료보기=>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39가지 안식일 금법
2.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막 2:27-28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눅 14:3,5-6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이들은 무엇이 더욱 중요한 것인지를 잃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보다 본질적인 것인지를 잃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권세도, 부귀도, 지식도, 명예도, 쾌락도, 생명을 잃으면 함께 잃게 됩니다. 실제로 수험생들이 심한 스트레스로 그만 삶의 의미 자체를 상실한 채 자살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너무 돈을 버는 일에 빠져서 그만 영혼이 숨쉬고 있는 생명이 질식한 채 하나님이 주신 참된 안식을 얻지 못하는 경우들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옛 사람의 생명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새 사람의 생명은 이미 안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진정한 안식을 잃은 인생들에게 오셔서 참된 안식의 삶을 주셨습니다.
히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천국과 지옥을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계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계 14:13 ...자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고통이 그치는 곳, 헛된 수고가 그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수고가 그칠 줄 모르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3. 주일은 종말론적인 참 안식의 예표
구약에서는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주일 곧 일요일을 지킵니다. 이는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끝나고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곧 예수님은 안식일을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주일입니다. 그리고 이 주일의 삶은 장차 우리에게 임할 영원한 천국의 삶의 예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의 삶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히 안식할 천국의 삶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삶입니다. 이 날은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으로 세상에서 버림을 당하시고,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신 날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안식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바로 모든 이 세상의 율법과 죄인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 베데스다 못을 찾았지만 그곳에서 고침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은 곧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지로 그 못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는 자기의 힘과 의지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를 그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도 그 어떤 것도 그를 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방편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연약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뿐입니다. 아무도 그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세상에는 그리스도외에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이름이 없습니다. 열명의 정탐꾼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들어갈 땅은 좋지만 거대한 복병들이 무섭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바라보니 너무크고 무서워서 못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신 예수님보다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하는 것이 마귀의 일이라고 한 것이 더 크게보였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눈은 그들이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이스라엘의 주식인 빵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심있는 자보다도 믿음있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있는 자를 바라보십니다.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지 못하고 삼십팔년을 기다리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언제 물이 동할지도 모르는 베데스다 못을 쳐다보다가 지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시기 전에는 결코 안식이 없습니다. 이는 마치 배가 항구에 닻을 내리기 전까지는 쉼을 얻을 수 없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누려야 할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변화되어야 할 사랑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온전케 되어야 할 표준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회개하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러분, 주일은 종말론적인 날입니다.
주일의 삶이 내게 있다는 것은 내 안에 영생이 있고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다른 약속들이 있어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숨이 끊어질 때에는 그 모든 것이 다 해제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약속들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약속 앞에서 다 해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의 삶을 지키는 것은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의 신앙고백이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한 종말론적인 계시의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결코 빼앗길 수없는 안식을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는 그 아무도 없는 베데스다에서 주 예수님을 만나서 새 생명을 얻고 참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침상에 누워있는 고통스런 안식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 머문 평강의 안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참 안식은 끊임없는 새로움을 만듭니다. 새 힘을 얻습니다. 항상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심을 체험하고 그 분을 즐거워합니다. 이러한 안식을 위한 주일의 삶의 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첫째날입니다. 이 주일의 안식의 삶이 육일 간의 삶으로 이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