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Re:마리아 무흠설에 대하여
가톨릭 약사
1. 313 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로마에서 기독교를 허용하는 밀라노 칙령발표.
2. 378년 로마 교회 감독이 이교도 승원장(법황;法皇)을 겸한다고 발표하였다.
3. 테오도시우스 1세 때인 380년 2월에 '가톨릭 신앙에 대한 칙령'(De fide catholica)의
반포와 함께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공인 종교가 됐다
4. 394년 매일 거행하는 미사가 채용되었다.
5.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마리아에 대한 예배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교리를 제정하였다.
6. 528년 수도원 제도 이태리 몬테 카지노에 최초의 수도원을 세웠다.
7. 590년 그레고리 1세가 교회 황제로 취임하였다.
8. 593년 연옥 교리는 그레고리 1세가 발명하였다.
9. 600년 교황 그레고리 1세는 기도와 예배에 라틴어만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고전14:9)
10. 800년에 마리아와 죽은 성도에게 기도하게 가르치게 되었다.(마11:28, 눅1:46, 행10:25-26, 14:14-18)
11. 709년 교황의 발에 키스하는 이교도들의 행사가 시작되었다.(행10:25-26, 계19:10, 22:9)
12. 750년 교황의 세속적인 권력을 주장하게 되었다.(마4:8-9, 마9:20-25, 요18:38)
13. 788년 십자가와 초상과 유골 숭배가 시작되었다.
14. 850년 소금물을 뿌리는 성수 의식이 발명되었다.
15. 850년 교황 레오 4세는 산타 스칼라의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는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의식을 시작했다.
16. 890년 성 요셉에 대한 숭배가 시작되었다.
17. 965년 교회에 종을 울리는 것은 요한 14세에 의하여 라테란 회의에서 제정되었다.
18. 995년 성도들의 서품(敍品)은 교황 요한 15세에의하여 시작되었다.
19. 998년 금요일과 사순절 금식이 시작되었다.
20. 1079년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성직자의 독신을 규정하였다.(딤전 3:2-5, 마8:14절-15)
21. 1090년 은둔자 베드로가 시작하였고 카톨릭이 이를 따르고 있다.
22. 1184년 그 악명 높은 종교 재판이 시작되었다.
23. 1215년에 화체설이 교황 인노센트 3세에 의하여 제정되었다.
24. 1215년에 고해성사가 교황 인노센트 3세에 의하여 제정되었다.
25. 1220년 떡을 숭배하는 의식이 교황 호노리우스에 의하여 발명되었다.
26. 1229년 톨로사 회의에서 성경과 여러 책들을 구독하지 못하게 하는 금령이 선포되었다.(요5:39,딤전3:15-17)
27. 1287년 교황의나 주교들이 입는 법복이 영국출신의 수도승 시몬 스톡에 의하여 발명되었다.
28. 1414년에 콘스탄틴회의에서 성도들에게는 성례식에서 떡만 주고, 포도주를 금하게 하였다.(마26:7, 고전11:26-29)
29. 1439년 피렌체에서 연옥에 대한 교리가 선포되었다.
30. 1439년 일곱 가지 성례가 피렌체 회의에서 비준되었다.(마28:19-20, 20-28)
31. 1196년 마리아 송이의 전반이 파리의 감독 오토가 완성하였고 후반부는 1568년 교황 피우스 5세가 완성하였다.
32. 1445년 트렌트 회의에서 유전이 성경과 같은 권위가 있다고 선언하였다.(막7:7-13, 골2:8, 계22:18)
33. 1546년 트렌트 회의에서 외경을 성경에 포함시기는 오류를 범하였다.
34.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가 마리아 무원죄 잉태설을 발명하였다.(롬 3:29, 시51:5, 눅1:30,46-47)
35. 1870년 교황 피우스 9세는 교황 무오설을 주장하였다.
36. 1907년 교황 피우스 10세는 현대 과학이 발표한 모든 것을 다 이단적인 학설로 정죄하였다.
37. 1917년 마리아가 은총의 중재자라고 확정 발표하였다.
38. 1930년 교황 피우스 11세는 모든 공립학교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하였다.
39. 1931년 교황 피우스 11세는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교리를 재확인하였다.
40. 1950년 피우스 12세는 마리아가 부활 승천하였다고 선포하였다.
41. 1962년 교황 요한 23세는 마리아가 종신처녀로 지냈다고 선포하였다.
42. 1996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이라고 선포하였다.
로마카토릭에서는 꾸준하게 마리아숭배를 한 것이 역사를 보면 나온다.이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여기에 보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동안 마리아에 관한 교리만 9 가지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에 대해 좀더 알려진 근거들을 살펴보겠다.
많은 학자들은 이를 바벨론의 신화와 연결시키려 한다.
바벨로니아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 중에 최고 신은 마르둑(Marduk)이었다.
일반적으로 신화가 발달한 나라는 그리스와 로마이지만 그 기원은 거의가 다 바벨론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 본다.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창9:7) 하셨는데
창10장에 홍수 후에 노아의 아들들이 번성하는 중에 구스와 그의 아들 니므롯이 나온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창10:8-9)
성경에 이 니므롯이 세계의 영웅이라 불렀다.
요세프스도 니므롯을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게 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니므롯이 하나님의 땅에 편만하라는 말을 어기고 당시 시날 땅에 사람들을 모아 통솔한 것으로 되어있다.
니므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지 청년들을 선동하여 흩어지지 말자고 주장하며 바벨탑을 쌓았다.
이리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시날 평지에 건설된 바벨탑과 함께 바벨론은 하나님을 반역하게 된 기원이 되는 곳이 되었다.
그 이후로 성경에서 악령을 숭배하는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다.(창11:2)
그런데 구스와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Semiramis) 구전이 전해진다.
그녀는 남편 구스가 죽자, 다시 자신의 아들 니므롯과 결혼합니다.
그러나 그 남편 니므롯이 바벨론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인해 큰 할아버지인 셈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그의 시체를 여러조각을 내어 전국각처에 보내어 분함을 나타내었고, 이후 담무스(Tammuz)를 유복자로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녀는 죽은 니므롯은 하늘로 올라가서 태양신이 되었으며,
동시에 자신이 낳은 담무스(창 3:15)는 그 태양신이며 그가 바로 구세주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자기의 몸에서 난 자기 아들 담무즈와 결혼을 하므로 그역시 신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하늘 황후라고 하여 숭배를 받으며, 태양신 숭배 제도를 만들어서 시행하였다.
이 여인이 음녀(淫女)요 여신의 기원이며 어머니 신, 아들 신, 남신 여신의 기원이 된 것이다.
이후 담무스가 죽자 그를 위해 40일 간을 애도하는 기간을 갖으며 담무스의 죽음에 대하여 추모 하였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에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겔814)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비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 황후를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느니라 "(렘7:18)
그리하여 이 신화가 바벨탑을 쌓다가 흩어지면서 온 세상에 어머니 신과 아들 신 곧 여신과 남신의 사상이 일반화된 것이다.
이렇게하여 로마가 지배하던 영역중 많은 지역의 사람들에겐 이미 이 어머니신, 아들신의 사상이 퍼져있었다.
여신 혹은 어머니 신과 아들 신을 섬기는 것이 익숙한 세상에서
성모 마리아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게 하는 것이 카톨릭의 착상이다.
그들은 A. D. 431 년 에베소 회의(The Council of Ephesus)에서 마리아의 무흠설을 주장하다가,
최근에 와서 완전히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확정을 지웠다. (1931년 데오토코스 논쟁 종결 확정)
1854 년에는 교황 비오 9세가 마리아 무원죄 잉태설(Immaculate Conception)을 발표하였다. 그 기념 축제일이 12월 8일이다.
그 이후로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은총의 중재자라고 확정지었다. (1917)
이에 더하여 유명한 카톨릭 저술가 알폰수스 리큐오리는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것 보다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더 효과적인가 하는 이론을 썼다.
이로인해 리큐오리는 교황 그레고리 14 세로부터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고
교황 비오 9세는 리큐오리를 카톨릭 교회의 박사로 선언하였다.
이후 가톨릭은 1950년에는 마리아 부활 승천설을 발표,
1951년 교황 비오 12세는 마리아의 몸이 썩지 않고 하늘로 올리어졌다는 발표를 하므로,
가톨릭은 자신들의 성모 숭배교리를 더욱 굳게 세워가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 숭배 (마태복음 12장 46-47절)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있을 때 대형 소포가 배달되었다.
거기에는 4383장의 청원서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성모 마리아를 예수와 함께 공동의 구세주로 교리화하고 교황의 권위로 선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청원서를 보낸 사람은 수 백명의 주교와 42명의 추기경, 마더 테레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마크 미러벨 주교가 주도하고 있는 이 마리아 구세주 만들기 주장이 만약 로마카톨릭 정식 교리로 채결된다면 아마 개신교는 로마카톨릭과 다시 한 번 완전 결별해야 할지 모른다. 로마카톨릭 내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논쟁중이라고 한다.
마리아를 숭상한 것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사실 민중의 요구에서 나온 것이다.
글을 모르던 시대 주로 그림이나 석상을 보고 믿었는데 아무리 봐도 하나님의 모습은 안나오고, 그렇다고 예수님을 보니 거의 피에 물든 섬뜩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믿을만한 신앙의 대상을 온화하고 부드러운 여인인 마리아에게서 찾기 시작했다.이 마리아 숭배 신앙이 서민들 사이에 커져가자 지금부터 약 100년전 비오 9세라는 교황이 마리아 무흠설을 발표했다. 예수님의 원죄 없음의 문제를 증명하려는 신학적인 논쟁에서 들어간 것이지만, 사실상 마리아조차도 죄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어쨋든 마리아도 예수님처럼 원죄가 없다고 발표되자, 그 후부터 성모 평생 처녀설, 성모승천설까지 잇단 교리로 채택되어 거의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8월 15일을 성모 승천일로 지정해서 지금도 국가 공휴일로 쉬고 있는 실정이다.마리아를 구세주로 승격하려는 노력들도 현장에서 목회하면서 백성들에게 더 쉽게 접근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이다.누가복음 11장 27절에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후 한 여인이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하며 예수님의 어머니를 칭찬하다.
예수님이 성모숭배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지하는 견해를 가졌다면 약간이라도 긍정적으로 대답했을 것이다.누가복음에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낳은 태와 젖이 복이 있다며 마리아를 찬양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11장28절).말씀을 지키는 것이 어머니보다 더 낫다고 말씀하신다.
또 마태복음 12장 46-47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로마카톨릭은 여기 나오는 동생들이 모두 예수님의 사촌동생이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가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만 낳고 평생 처녀로 살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귀하신 마리아의 등장에도 특별대우를 하시지 않는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오히려 마리아를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일반 성도 가운데 한명으로 밖에 보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