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복된 자 (계 1:3)
이 시간에는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복을 통해서 “진실로 복된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복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최고의 복이 무엇일까요? 물질 권세 명예 건강 형통 장수 자손,,, 어떤 것이 복일까요? 그것도 복은 복이지만 최고의 복은 아닙니다.
최고의 복은 바로 하나님을 얻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 속에서 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복 자체요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 것만 가졌다면 그것은 빈껍데기만 가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예수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최고의 복을 누리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바로 이 복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어떻게 해야 복의 하나님을 모시되 바로 온전히 모실 수가 있는가? 그래서 계시록에는 모두 일곱 번의 복이 나타납니다. 계시록에서 7은 7이 완전수이듯 완전한 복을 말해줍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가지의 복을 살펴보는 가운데 진실로 복된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복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1. 예수를 나의 주로 믿는 자입니다.
계1:3에 그 첫째 복이 나타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받는 복이란 무엇일까요? 계시록의 내용의 핵심을 알아야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이 외치셨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계시록을 이상하게 풀면 안 됩니다. 계시록은 다름 아닌 복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가깝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재림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된 종말론적인 관점으로는 구원을 지칭하는 관용구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막1:15에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느냐? 예수님의 복음을 읽고 듣고 깨닫고 믿는 자입니다. 계시록을 보면서 예수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방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헛되이 본 것입니다.
계22:8절에 요한이 실수로 경배했던 천사로 나타난 성도가 있습니다. 그 천사는 자신을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성도는 계시록을 깨닫고 지키는 자의 복된 모델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종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뿐 아니라 자세 역시 거기에 부합하게 온전히 종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주여 주여 부르는 것도 좋지만 이 고백과 이 모습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주 예수를 바로 믿는 것이 복된 성도였으면 요한이 실수로 경배하고자 했을까요? 그러므로 예수를 주로 믿는다면 거기에 부합하게 더욱 온전히 삶에 적용하는 복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자입니다.
계14:13에 둘째 복이 나타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여기 “주 안에서 죽은 자”란 일반적으로는 예수 믿고 임종한 자를 가리키지만 문맥을 자세히 관찰하면 이 죽음은 특수한 형태의 죽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을 개역성경에는 자금이라 했듯이 이 죽음은 스스로 죽어야 하고, 지금 이후 즉 현재를 포함해 죽어야 하며 또 한 가지는 죽되 주 안에서 죽어야 하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죽음이라면 내가 십자가에 죽고 의로 다시 사는 죽음 말고 무엇이겠습니까?
문자대로만 해석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럼 이미 죽은 성도는 복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스스로 죽는다란 자살을 의미하는가? 그래서 성경을 육신적으로 풀면 안 됩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기 스스로 지금 주 안에서 죽는 죽음은 바로 지금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내가 죽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듯이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자아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주장을 포기하고 순복하는 겸손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나길 때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은혜를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딤후2:11-12).
3. 깨어 자기를 씻는 거룩한 자입니다.
이것이 계16:15에 나타나는 세 번째 복입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거룩한 자가 복이 있다는 교훈입니다.
여기 옷이란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세마포 즉 거룩한 의의 행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어 용서의 확신 가지고 칭의를 입고 나아가 날마다 성령을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칭의는 믿음으로 되지만, 성결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 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 받는 영원한 속죄가 전부가 아닙니다. 몸을 씻었으면 발도 씻어야 합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노아와 같이 깨끗한 심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도적 같이 오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늘 깨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게으르고 방심하든지 쓸데없는 일에 치중하여 때리고 방탕하면 영적으로 완전히 폐가 망신합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넘어져 거룩한 의를 지킬 수 없습니다. 시험 들지 않으려면 경성하여 깨여 있어야 합니다.
성결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그래서 사57:15에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했습니다.
거룩함과 화평함이 없이는 주를 모시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씻음의 반복적인 일은 존재하겠지만 늘 거룩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 심령만이 복의 하나님을 합당하게 온전히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4.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계19:9에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이것이 계시록에 나타나는 넷째 복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례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혼인잔치는 코 묻은 어린이가 참례하는 것이 아니고 장성하고 아름다운 신부가 참례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성도는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이지만 신부에 합당한 수준에 이르렀느냐 했을 때는 다릅니다.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고 육에 속했다면 어린이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고전3:1에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라 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신부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을 사랑해야 신부인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그 동안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참된 행복을 주님께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 은혜와 행복을 하나님은 아가서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일편단심 주님만 사랑하는 사랑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아버지께서 온전히 함께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랬기에 큰일을 하실 수 있었고 그랬기에 가장 행복하셨습니다. 최고의 복은 복이신 하나님을 바로 모시고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를 나의 주로 믿고 섬기고, 내가 죽고 예수로 겸손히 살며, 날마다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를 씻고,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고 가장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