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어기면
글/김병덕 목사
야고보서2:10-13절을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야고보서는 난해 합니다.
사실 난해하기보다는 성경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복음이 가장 많이 훼손이 되고 있는 성경이 바로 야고보서이기도 합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대비해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모두 같습니다. 만약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는 내용과 야고보서에서 말씀을 하는 내용의 본질이 다르게 되면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랬고 마찬가지로 이 시대도 믿음이 있는 자가 적은 이유는 바로 성경을 바로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한 마디로 줄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느 성경이라도 이것에서 벗어나는 해석을 하게 되면 무조건 이단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봐야 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성경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으라고 말씀을 하고 어느 성경은 예수만 믿어서는 안 되니까 이러이러한 행위들을 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는 어느 것도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다른 성경은 안 된다 믿음만으로 안 되니까 너희가 이런 행위를 해야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행위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이 아닙니다. 오직이라는 말씀은 다른 것이 필요치 않고 믿음만 필요할 때 오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 해 놓고서 그러나 성도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믿음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가 섞여 버린 아주 이상한 논리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인 음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 이 시대 뿐 아니라 창세 이후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율법에 대한 정의가 바로 서 있지 못하다는데 있습니다. 율법이 바로 정립되어 있지 않으니까 자기가 율법주의에 빠져 음행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분별을 하지 못 합니다. 저도 모태 신앙입니다. 제가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율법이 저를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나를 비추어 보면 도저히 자신이 없어 미루고, 미루고 하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나중에는 강권적으로 저를 이끌어서 신학을 공부하게 하셨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아니 은혜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겠지요.
저는 제가 목사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는 순간 제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또 성경을 읽으면서 지혜를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제가 율법주의를 가르치는 곳에서 갔다면 저는 그 길로 발걸음을 돌렸을 것입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마 세상에서 내 영혼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방황을 하면서 헤매고 있었을 것이 뻔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율법에 대한 정의를 바로 한 것은 아닙니다. 거의 십여 년을 성경을 연구를 하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지금은 율법에 대해서 단호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영혼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율법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스스로 정죄에 빠져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안 하자니 찜찜하고 하고는 있지만 왠지 모르는 불안감이 자기 스스로 정죄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율법에 폐해졌습니까?
이 질문을 하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제사법과 시민법은 폐하여 졌고 도덕법은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거의 다수가 이 대답을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왠지 찜찜하기도 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수많은 이단들이 태동을 하고 있습니다. 도덕법이 살아 있으니까 안식일 교회가 태동을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에 사실 교회가 마땅한 답변을 하기가 궁색하기만 합니다. 또 그런 이단들은 봐라 도덕법이 살아 있는데 저들은 안식일조차 범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쉽게 미혹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단들이 가장 공격을 하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안상홍증인회 같은 곳은 유월절에 대한 것을 아주 강조를 하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교회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들의 주장을 들으면 일반 교인들은 거의 다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교인들이 이단들을 저척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일단 그들과 교제를 하게 되면 거의 90%이상은 넘어간다고 봐야 합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 더 명확하게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율법에 대해서 바른 정의를 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궁색하기만 합니다.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단들 입장에서는 아주 궁색한 답변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다 폐해졌습니까? 아니면 도덕법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이 부분에 대한 정의를 바로 하지 못하면 절대로 복음을 깨달을 수 없으며 결국에는 율법주의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율법과 복음 두 남편을 섬기면서 영적인 음행을 하게 됩니다. 그 답을 야고보서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율법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 야고보가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이 말씀은 뒤집어서 말씀을 드리면 하나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온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온 율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에 나오는 613가지 율법을 온 율법이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와 같이 모두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지 그것을 따로 떼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이렇게 야고보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간음한 자와 살인한 자가 같습니까?
그러나 야고보는 분명하게 간음을 한 자는 살인을 한 자와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살인을 안 했어도 간음을 했으면 살인을 한 자가 되고 간음을 한 그것으로 율법을 범한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도덕법만 살아 있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바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순간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고 율법과 복음의 두 남편을 함께 섬기면서 음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간음한 자는 살인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도덕법이 살아 있습니까? 그럼 도덕법을 다 지키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일반 교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안식일이 변해서 주일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주일을 다 지키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주일에(안식일) 대한 규례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주일을 지켰어도 그 규례를 안 지켰다면 그는 이미 안식일을 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범한 사람은 간음을 한 사람이고 또한 살인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율법대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온 율법 613가지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한 가지라도 범하며 모두 범한 자가 됩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도덕법이 살아 있다면 그래서 그 도덕법을 지키고 있다면 온 율법이 함께 살아난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도덕법만 살아나면 참 좋은데 그것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 규례가 다 살아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제사법, 시민법 죽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도덕법에 대한 규례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규례가 안식일을 범하면 돌로 쳐 죽이는 것이고 또한 안식일에 불을 피워 밥을 하는 자는 무조건 돌로 쳐 죽이라고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다 지키고 있습니까? 아마 이것을 아는 순간 도덕법이 살아 있다고 감히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일을 범하는 사람을 돌로 쳐 죽이지도 못하고 주일 날 불을 피는 사람을 돌로 쳐 죽이지도 못하는 그 법이 살아 있다고 억지 춘향으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간음을 한 자가 살인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주일에 불을 피워서 밥을 해 먹은 사람도 주일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돌로 쳐 죽여야 할 것 아닙니까? 법이라는 것은 그것을 집행할 때 살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집행하지도 않는 법은 살아 있는 법이 아니라 죽은 법입니다. 도적질을 하면 구속을 합니다. 만약 도적질을 했는데도 구속을 하지 않는다면 그 법은 죽은 법입니다. 아니 솔직히 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살인한 사람을 그냥 놓아두는 것이 법입니까? 살인을 했으면 그 사람을 잡아다가 법에 따라 집행을 해야 그 법이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라면 여러분은 다 살인자들입니다.
이미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안식일에 대한 규례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간음한 자요 살인자입니다. 겨우 일요일 날 교회 나와서 예배를 드렸다고 자기는 주일을 지켰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이래도 도덕법이 살아 있다고 주장을 하겠습니까? 이 도덕법이 살아나는 순간 모든 율법 613가지가 다 살아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율법에 의해 진노를 받게 됩니다. 겨우 몇 가지 지키고 있는 아니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그 율법을 보면서 도덕법이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살인자이며 간음을 한 자입니다.
율법은 다 폐해졌습니다.
만약 안폐해 졌다면 우리는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이 살아 있다면 율법은 반드시 그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인한 자가 되어 율법의 진노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간음을 안 하고 살인을 안 했어도 주일날 불을 피워 밥을 해 먹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온 율법을 다 지키다 하나를 범했기 때문에 모두 범한 자가 되어 살인자로서 율법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율법이 폐해졌느냐 안폐해 졌느냐 하는 문제는 너무 중요합니다. 영혼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육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며 어느 쪽을 따르느냐에 따라서 그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또 사망을 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 이제 이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아니 저에게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도적질을 해도 괜찮고 살인을 해도 괜찮고 간음을 해도 괜찮냐 하면서 따지듯이 묻습니다. 참으로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살인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독재 국가인 북한이라도 살인자는 반드시 처벌을 합니다. 살인자뿐만 아니라 도적질을 한 자도 잡아서 구속을 하고 법에 따라 처벌을 받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그런 도덕적인 범죄를 저지르면 법이 그 사람을 구속을 합니다. 그것을 교회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도덕법이 살아 있다면 살인한 자를 반드시 교회가 그 살인자를 끌어 내어 죽여야 합니다. 율법에 대한 도덕법은 죽었지만 사회에 대한 도덕법은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도덕법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회에 이미 도덕법이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죽어 있는 율법을 교회가 도덕법이라는 미명아래 다시 살리고 있습니다. 그 도덕법만 살아나면 좋은데 온 율법 613가지를 다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한 가지 도덕법을 살리는 순간 나는 온 율법에 의해 반드시 진노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반드시 진노를 가져오는데 이 율법이 살아 있다고 아니 법을 집행하지도 못하는 법을 살아 있다고 허황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회에서 도덕법에 따라 잘 살아가고 있는데 도덕법이라는 것을 살려서 교인들을 구속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빼앗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도덕법이 폐해졌다고 하면 살인을 할 수 있습니까?
율법주의 사상에 빠져 있는 사람은 마치 그럴 것처럼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법이 없을지라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못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회에 분명히 법이 있는데 감히 누가 도덕법에 폐해졌다고 살인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회법이 이미 우리를 강제하고 있습니다. 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도적질 하지 않고 있고 살인을 하지 않고 있고 또 규례가 있기 때문에 내 부모를 공경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행도 하지 못하는 교회에서 그 법이 살아 있다고 주장을 하는 것은 모두를 살인자로 만드는 일입니다.
법이 사는 순간 나는 살인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에 거치면 모두를 범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인을 안 했어도 주일 날 불을 피워 밥을 해 먹었다면 나는 이미 율법의 하나를 거친 자이며 그럼 살인을 한 자입니다. 살인자가 되고 싶으면 율법을 살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키시기 바랍니다. 율법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지키고자 하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살인자가 되며 율법의 진노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입니다.
율법은 유기체입니다
마치 한 생명과도 같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것은 죽이고 어느 것은 살리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살리면 모두가 다 살아나고 모두를 죽이면 다 죽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죽이면 다 죽고 그 중에 어느 것 한나라도 살리는 순간 모든 율법이 다 살아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율법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순간 나는 율법을 범한 자가 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는 가 스스로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도덕법뿐만 아니라 제사법까지 다 살아나 있습니다. 맥추절을 지키려면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지키지도 못하면서 맥추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모한 짓을 행하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교회는 음행에 빠지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음행이라고 하니까 실제 육체적인 간음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데 두 남편을 섬기는 것을 음행이라고 합니다. 바로 율법의 남편과 복음의 두 남편을 섬기는 교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교회는 점점 더 음행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제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보시면 알게 됩니다. 마지막 교회는 교회가 일치가 되어 복음과 율법의 두 남편을 섬기는 지극히 거룩한 교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도 잘 믿고 율법도 잘 지키는 아주 이상적인 교회가 된다는 것을 바로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조금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공동번역입니다.
“여러분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법에 따라서 장차 심판받을 사람들이니 그런 사람답게 말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 하는 법을 주셨습니다. 자유를 주셨는데 그 자유를 따라 행하면 그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에서 자유 함을 얻은 성도는 그 자유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율법에서 자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도는 율법에서 자유 함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자유 함을 얻은 사람처럼 행하는 성도는 율법에서 자유 함을 얻었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 하는 그 법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에 자유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유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 하면서도 자유하지를 모하고 아직도 율법에 의해 구속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면 율법에서 자유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유 하지 못하고 다시 율법을 따라 행하면 온 율법 중에서 하나에 거치면 모두를 범한 자가 되어 결국 율법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럼 그 자유를 주신 대로 행하고 그렇게 말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이렇게 말을 하면 아마 방종을 한다고 공격을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하지 못하고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에 거쳐서 살인자가 되고 있습니다. 자유를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갈라디아 교회에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서 그들이 예수 안에서 누리고 있는 자유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바른 정립이 되어 있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율법은 긍휼을 베풀지 않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바로 율법입니다. 살인한 자는 반드시 죽이는 것이 율법이고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을 폐해 버리셨습니다.
마태복음5:38-39절을 보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을 폐하시고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돌려 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반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육체로 율법을 폐하실 것을 아시고 지금 그 율법대로 행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습니다.우리 카페의 동영상에서 어린아이가 빵하나 훔쳤다고 손하나를 자동차 앞바퀴에 넣어서 짜르는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율법을 잘지키는 무술림들이 하는 행위를 잘아실 것입니다. 율법은 긍휼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간음한 여자도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율법은 반드시 돌로 쳐 죽여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도는 율법에 따라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설령 그가 죄를 질지라도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폐해진 사람만이 죄인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아직 율법이 살아 있는 사람은 절대로 죄인을 보고 긍휼히 여기지 않고 법대로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사상이 문제입니다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내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율법이 폐해져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율법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까? 율법이 살아 있는 사람은 법에 따라 정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정죄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도 역시 그 율법에 의해 정죄를 똑 같이 당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폐해졌습니다.
그렇게 믿는 성도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폐해진 율법을 가지고 정죄를 하고 말 것이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율법의 심판을 이기고 자기 믿음을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으세요. 지금은 은혜의 기간입니다. 믿기만하면 구원해 주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죄를 지고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내죄가 사해진 것도 믿습니까? 그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성도는 모든 율법을 폐하고 자유 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고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또 자기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