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감사를 찾아라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삶이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한다. 누가 기뻐할 수 있는가? 감사를 아는 자이다. 누가 기도할 수 있는가? 감사를 경험한 자이다.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가? 모든 일을 감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권면한 감사에는 어떤 조건으로 인해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으니, 이는 감사하기 위해 조건을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온갖 희노애락의 일들이 난무한다. 자신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일 뿐 아니라, 자신을 슬프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일들이 서로 엉키듯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것은 감사할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감사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끈임없이 교차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란다. 상황이나 조건을 따져가며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란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방법이란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피조물된 사람이 어찌 조물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감사해야 한다. 무조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감사할 줄 아는 자가 기뻐할 수 있고, 감사를 아는 자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참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감사를 잃어 버렸다. 감사를 잃어 버린 삶에서 어찌 기쁨을 찾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할 수 있으랴. 없다. 기쁨보다는 낙심으로 인한 슬픔과 외로움에 엄습되어 우울해질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면서 온갖 투정과 푸념 속에 요구사항만 늘어 놓는 염치없는 기도이거나 중언부언하는 방향을 잃어 버린 기도가 전부일 수 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외면하신다.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기도를 하는 일이야 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기도랴!
이런 사람의 삶은 감사를 잃어 버린 자이다. 최근의 내 삶이 바로 그와 같았다. 나는 감사를 잃어 버렸음에도 그것을 언제, 어디서 잃어 버렸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가장 기본이 되는 필수적인 조건을 잃어 버렸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니 기쁨의 삶은 내게서 멀어졌고, 나의 기도 역시 항상 공허한 듯이 여겨졌다. 어제 한 기도 오늘 또 하고, 조금 전에 한 기도를 또 다시 반복한다. 이렇게 방향도, 질서도 없이 중얼거리 듯이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어찌 응답하실 수 있으시랴!
최근 몇 달동안 밤에 평안한 잠을 자지 못했다. 온 몸에 두드러기가 일어나 가려워서였다. 낮에는 멀쩡했다. 밤에만 일어나는 두드러기로 몸과 마음이 지칠정도였다. 몇 년 전에도 아주 심한 두드러기로 인해 고생한 적이 있었다. 중의사가 처방한 작은 알약을 복용하면 두드러기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에 두드러기가 생긴 이유를 알게되었다. 탕제의 장기복용이었다. 탕제복용을 중단하면서 두드러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에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두드러기도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의사는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몸이 차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며 '몸을 덥게 하라'고 했다. '그런가?'하여 전기장판으로 침대를 따뜻하게 하여 잠을 청했다. 누군가가 '수면양말을 신으면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다'고 하여 고국을 방문중인 지인에게 '수면양말을 몇 켜리 사다 달라'고 요청하여 그것을 신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온 몸에 땀이 나서 불편했지만 그래도 두드러기가 치료된다면 그런 불편쯤은 감당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두드러기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여전했다.
어떤 분은 오래 전에 자신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몸이 너무 피곤해서 그렇다'고 했다. 그 때 그는 '여러 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받았고, 여러 가지 약들을 복용했지만 두드러기는 개선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어떤 한의사가 '피곤해서 일어나는 두드러기이니 무조건 쉬라'고 하여 그 의사의 말대로 '무조건 쉬었더니 두드러기는 점점 개선되어 치료되었다'며 쉴 것을 권고했다.
나는 인터넷에 접속하여 카페에 자료들을 업데이트하기 위해 장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을 알고 '몹시 피곤할 것'이라지만, 나는 이상하리만큼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피곤하다. 한쪽 시력을 잃으면서 독서도 부담스럽다. 그런데 컴퓨터 앞에 앉아 집중할 때면 피곤함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듯이 여겨진다. 그래도 아내와 다른 이들은 내가 '피곤을 느끼지 못할 뿐, 몸은 실제로 많이 피곤한 것'이란다. 그래서 두드러기가 심한 것일지도 모르니 무조건 쉬란다.
나는 지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뒤로 미루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지금 해야 할 일을 어찌 다음으로 미룰 수 있단 말이랴. 그렇지만 아내와 다른 이들의 권면을 받아드리기로 했다. 몸이 피곤하지 않도록 짧은 시간동안 일을 하고 많은 시간을 쉬었다. 평소 낮에는 도무지 침대에 눕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렇지만 몸을 쉬게 하는 방법은 침대에 눕는 것뿐이라 여겨 낮에도 자주 침대에 누워 쉬었다. 그런데도 두드러기는 도무지 개선될 기미가 없었다.
한 번 긁기 시작하면 끝없이 가려워지는 두드러기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내게는 매우 심각하고 중요했다. 오랜 날을 통증과 함께 지냈다. 그 때 나는 '통증도 즐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두드러기는 어떤 면에서 통증보다 더 힘겹게 여겨질 정도다. 따라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몸을 덥게하거나 쉬기 위해 노력했다. 꾸준히 일 주일에 두 번씩 병원에서 침도 맞았다. 그래도 두드러기는 여전했다. 전혀 개선되지 않고 어느날은 더 심해져 괴로웠다.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런 반복된 생활이 계속되던 열흘전쯤이었다.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생각하니 그날 밤에는 잠자리가 비교적 편안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밤에는 그동안 몇 달을 괴롭혔던 두드러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다음날도, 그리고 또 그 다음날도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할 정도로 괴롭혔던 두드러기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왜 갑자기 내 몸에서 두드러기가 사라진 것일까? 몸을 따뜻하게 해서였을까? 피곤한 몸을 쉬게해서? 섭생의 변화가 있어서? 아니면, 중의사의 침술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다'싶은 것이 없다. 스스로의 어떤 노력으로 두드러기가 치료된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됐다. 그렇다면 원인이 무엇일까? 이걸까, 저걸까? 그것이 알고 싶었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반복하여 십여일이 지나도록 두드러기는 재발되지 않았다. 참 신기하다고 여겨질 뿐, 더 이상은 두드러기가 치료된 원일을 알 수 없었다.
두드러기가 치료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도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아내가 갑자기 '당신의 두드러기는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신 것이네! 그걸 왜 여태 생각하지 못했지?'라고 말했다. 그렇다. 내게 두드러기가 사라진 것은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셨다. 내가 취한 어떤 방법 때문에 치료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치료해주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주 쉽게 생각할 만한 일이련만, 도무지 깨닫지 못한채 엉뚱한 원인만을 찾으려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다.
왜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었을까? 감사를 잃어 버린 까닭이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너무 쉽게 말했을 뻔했던 일을, 나 스스로에게는 전혀 깨닫지 못할 이유는 내가 감사를 잃어 버린 까닭이다. 감사란 무엇인가?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다. 고마움에 대한 인사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스스로를 만족하게 하는 일을 감사하기란 매우 쉽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감사를 잘 표현하지 못한다. 고마움을 느끼는 것과 그 고마움에 대한 인사에 인색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데 하물며 자기 스스로를 전혀 만족하게 하는 일이 아닌 것까지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했다. '범사'란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일을 포함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권면은 스스로 불만족스럽지 못한 일까지 감사하라는 것이다. 이런 감사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안하면 안되는, 그래서 꼭 해야 한단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누가 거역할 수 있으랴! 그렇지만 그 일이 어디 쉬인 일인가. 누구나 자신을 스스로 만족케 하는 일은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다. 하지만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어느 누가 쉽게 감사할 수 있으랴. 이는 필시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평범한 감사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감사는 전혀 다른 감사다. 이렇게 전혀 다른 감사를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행해야 한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 아닌 범사의 감사. 그것은 반드시 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감사해야 한다.
오랫동안 감사를 잃어 버렸다. 그런데도 감사를 잃어 버렸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지냈다. 그랬기에 무엇인가에 짖눌린 삶을 살았다.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안함과 기쁨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그런 삶이었기에 얼마동안 아무 글도 쓸 수 없었다. 웬지 모르게 자꾸만 마음이 우울해졌다. 이런 감정을 뿌리치고 싶어도 도무지 뿌리칠 수 없어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하기만 했다. 한 없이 불랙홀로 빠져드는 듯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내의 말 한 마디가 나를 깨웠다. 적라라하게 발까벗겨진 듯한 나의 어리석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 잃버린 감사를 찾아야 한다. 어디서 잃어 버렸는지 묵상하여 감사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조건에 의한 감사가 아니다. 무조건적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직시해야 한다. 감사할 때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때 참된 기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한 번 더 깊이 묵상한다. 이제는 잃어 버린 감사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 나 스스로를 깊이 살피련다. 매 순간마다 내가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 마음을 모아 주를 바라보련다. 깨닫게 하심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삶을 살기로 분발할 것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굳게 다짐한다.
2011. 12. 6 (화)
글/ 불꽃 石一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