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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겐세일만도 못한 예배

힘찬 발걸음 2011. 11. 6. 13:25

세일만도 못한 예배

글/김남준 목사

 

예배, 신앙의 중심부

신앙의 중심부에는 반드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경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바로 그런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교회의 예배상황은 영적인 수준과 신앙생활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4장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수가성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을 주제로 이 여인과 대화를 하시면서 이 우물의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은 이제 목마르지 않는 바로 그 물을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는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목마르지 않고 흡족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과 예배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공적인 예배의 중요성

성경에서 공적인 예배는 언제나 개인적인 예배와는 별도로 강조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그의 은혜로 살아가는 피조물들임을 예배 속에서 입증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당신이 쓰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단지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며 그분만을 경배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오.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크고 작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예배의 가장 중요한 방식이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공적인 예배에 함께 참여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4,25) 이 말씀은 이미 초대교회 시대부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공적인 예배의 모임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는 일들을 게을리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어둡고 추울수록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예배해야 할 필요를 더욱 많이 느꼈습니다. 비록 적은 수의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언제나 모이기를 즐거워했으며 그 일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용기와 위로를 얻었습니다.

 

예배하며 산 성도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공적인 예배에 대한 강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후 그들이 잃어버린 첫 번째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의 상실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에 의해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 4:4,5) 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드리는 예배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가와 하나님 앞에 어떤 판단을 받고 있었는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온 땅에 생명 있는 것들을 물로써 심판하신 홍수 사건 이후에 하나님이 다시 이 땅을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증표를 주신 것도 바로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와 온 땅을 심판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모세시대에 율법을 따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막과 성전의 공적인 예배를 함께 드리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겨레공동체에서 제외되어야 했습니다.

 

유행처럼 번지는 태만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있고 나서 그 사건은 즉시 선명한 복음의 선포를 가져왔습니다. 교회는 진리를 외치는 설교자를 갖게 되었고 그 진리가 울려 퍼지는 곳에는 예배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이 온갖 위협과 대적들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위대한 능력을 예배를 통해 공급받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없는 성경의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공적인 예배의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는 세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만은 언제나 있는 일입니다.

 

클락슨(David Clarkson) “공적인 예배에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은 살아난다. 성자께서는 그곳에서 병든 영혼들을 말씀으로 고치신다. 그 예배에서 성자께서는 사단을 쫓아내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공적인 예배에서만 이 일을 행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예배는 주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행하시는 유일한 정상적인 수단이다.”

 

세일만도 못한 예배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은 마치 행동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신은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경배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존재임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공적인 예배에 참석해야 할 의무는 교회에 대한 것도 아니고 목회자를 향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을 때, 목회자에게 인간적으로 죄송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안중에 없을 것입니다. 신자가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예배에 참석해야 할 의무를 기피할 때 교회는 여러분 없이도 은혜를 사모하는 다른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공적인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목회자나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유익을 위한 특권이고 또한 하나님을 위한 의무입니다.

 

은혜받는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일을 지키도록 제정해 놓으심으로써 육신이 쉴 수 있도록 안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휴식이나 안식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 날이 바로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편의대로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사소한 일들을 이유로 하나님 앞에 행해야 할 예배 참석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힘쓰고 애쓸지라도 영혼은 핍절하고 범사에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 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학 1:5,6)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예배에 참석해야 할 시간에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는 여러분이 없어도 될 자리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지정된 그 시간에 그곳에 있지 아니하면 여러분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비어 있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예배드려야 할 그 시간에 자신의 예배의무를 버리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예배시간을 아끼고 살면서 일평생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예배시간까지 바치면서 얻고자 하는 것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일까요? 여유가 생기면 그때는 예배를 잘 드리겠노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평생 쫓기듯이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공적인 예배에 힘을 다하여 참석하고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공급받으면서 어려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신앙생활에 힘쓰지 아니하면 하나님 앞에 심각한 불신앙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버림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지면 예배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행동입니다. “너희는 예배하라. 너희는 기도하라. 너희는 전도하라.”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그것은 의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따르는 마땅한 의무를 다하며 살겠다고 하나님과 교회 앞에 그리고 자신을 향하여 공적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가 떨어지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는 실로 배교에 가까운 생각입니다. 형식이 무너지면 내용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내용마저도 없어져 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적인 의무감만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할 마음도 없고 나아가서 예배의 의무마저 포기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나쁩니다. 이런 태도야말로 하나님을 막보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약속 있는 은혜의 수단

이 시대의 불신앙의 풍조를 본받지 마십시오. 오늘날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인 예배에 대해서 아무리 너그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죽은 자와 방불한 자들의 너그러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기뻐해도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공적인 예배에 참여하기를 힘쓰십시오.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잡다한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미안해하거나 목회자의 이해를 구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회복된 예배로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기를 게을리 할수록 여러분은 심각한 영적 손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은 생기를 잃어버릴 것이고 나아가서는 진리를 향한 갈망과 또한 하나님 자녀로서 본분이 무엇인지도 잊게 될 것입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유야 어떠하든 공적인 예배 참석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신앙 의무에 대해 방만한 것이며 그렇게 예배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 떠난 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적인 삶 속에서 이미 신앙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몸이 예배의 장소에서 이탈되기 전에 언제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백성 중에 횡행하는 헛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단호한 태도를 보면 참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유행하던 헛된 예배에 대하여 단호하게 경고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마15:8,9)

 

마음을 다하는 예배인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경외심이 사라질 때마다 차가운 형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를 대신하고 싶어하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영이시고 인격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단지 차가운 형식 속에서 우리 자신의 종교적인 요구나 만족시키기 위해 행해지는 것인지 혹은 진심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는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사람에게는 종교적인 보상심리가 있습니다.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몸은 주일이 되면 어김없이 교회 안에서 예배드리는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생활들을 한 순간 예배하는 형식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심리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 없이 차가운 예배의 형식을 되풀이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만이며 신성모독입니다. 바른 지식은 하나님을 만나는 다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예배에 대한 생각이 성경적이지 않다면 그러한 생각이 고쳐지기 전에는 예배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굳은 마음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감동하는 것도 바로 이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말미암는 감격이 있고, 그렇게 감격하는 인간들이 있을 때 하나님이 감동받으십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감격적인 예배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한 그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매일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나오는 그를 마귀가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물결이 아무리 성난 파도와 같고 죄악의 탁류가 홍수와 같을 지라도 그는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뵈옵는 신앙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영적 생기도 고갈되어 있을 것이며 언젠가 반드시 물러가 침륜하고야 말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적인 예배 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곧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교회의 영광스러운 특권

하나님의 교회가 다른 세속 기관과 다른 것은 죄인들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는 권세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문을 떠나 죄 가운데 빠진 사람들을 어떻게 건지십니까? 소망 없이 살아가는 영혼을 부여안고 어두운 길에서 헤매며 사망과 흑암의 그늘 아래 앉아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비참한 인생들을 어떻게 건지십니까? 삶과 죽음, 신앙과 불신앙의 갈림길에 서서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갈 길을 보여주십니까? 그들은 모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통해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예배의 최대 목표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기대를 갖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성도들의 바람으로 시작되고 그러한 바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 없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간구하는 바가 없이 기대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참여하는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형식만 남은 종교생활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속적인 정신

우리는 예배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가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지 못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게다가 예배를 통해 주시는 거룩한 약속들이 은혜로 나타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패 위에 무지를 더하고 있는 셈입니다.

 

예배의 축복이 사라진 교인들이 모여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경우 모두 바로 그런 형식적인 예배의 공범인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원인은 갈망이 없는 예배생활입니다. 세속에 대한 열심과 열망은 영적인 예배를 향한 영혼의 열망을 감퇴시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오고가는 수 많은 대화의 내용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관심거리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형식적인 예배를 통해 잃어버린 신앙의 기쁨과 하나님과의 만남의 축복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거나 마음 아파하지는 않지만 세상에서 성취하지 못한 욕망과 누리지 못한 기회들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음란한 마음으로 세상을 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배를 떠나 있습니다. 그들이 세속을 향한 뜨거운 열심을 간직한 채 신령한 예배를 향한 갈망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습관적인 지각, 준비 없이 드리는 헌금, 예배보다는 예배 이후의 시간을 고려한 옷차림 그리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황급히 교회당을 빠져나가는 것 같은 행동은 모두 준비되지 못한 예배의 단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일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중심이 되실 것입니다. 예배가 주일의 중심이 되게 하십시오. 최상의 건강과 최상의 마음, 최상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주일이 되기 위해서 한 주 동안 준비하십시오.      

 

맺음말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서 일주일을 삽니다. 일주일을 살기 위하여 하루를 하나님 앞에 예배합니다.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고 거룩한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애타게 기도하십시오. 이러한 간구와 기도 없이 예배에 나와서 단지 은혜로운 설교를 듣기 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설교자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수준을 능가하는 삶도 없고 삶을 능가하는 예배도 없습니다. 예배는 삶 안에 갇히고 삶은 예배 안에 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거룩한 만남을 주시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은 예배의 거룩함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배자의 가장 큰 제물이 하나님을 향한 상한 마음이며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심령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 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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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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