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기독교는 무기력한가?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지 1984년을 기점으로 기독교 전래 100주년을 맞았는데, 100년만에 이 만큼의 숫적인 성장한 경우는 기독교 전역사를 둘러봐도 없습니다. 100년만에 천만이라는 놀라운 숫자를 만들어낸 것은 희귀한 정도가 아닙니다. 현재 전국민의 25%의 인구가 기독교인입니다. 아파트단지 같은데 가면 교회 표시가 안붙어 있는데가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너무 무력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매우 강력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데도, 기독교 인구가 천만이라는 숫자가 되면서도 이렇게 사회적인 면, 삶의 면에서 왜 무기력한가를 우리들이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먼저 원인분석을 하고, 후반부에서는과연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성경적 관점속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무기력한 원인(신학적인 측면)
먼저 한국 기독교가 무기력한 원인 분석을 하자면 세가지 신학적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다른 차원에서도 여러가지로 설명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세가지를 보았습니다.
경건주의 영향
첫번째로는 경견주의 영향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경건하게 살려는주의라고 단순히 생각할지 모르지만 경건주의라는 것은 신학적 유형들중의 하나입니다. 경건주의는 독일에서 1700년대에 프랑케, 스페네를중심으로 일어난 운동입니다. 1517년 로마 캐토릭을 향해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운동(종교개혁운동)이 100년, 150년 지나면서 프로테스탄트자체가 맥이 빠져 형식주의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저는 사람이나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돌고 돈다는 것을 봅니다. 로마 카톨릭을 개혁하고 빠져 나왔으니까 몇백년 좋은 신앙으로, 활기찬 신앙으로 될것같은데 오히려 카톨릭은 싱싱해지고 프로테스탄트는 맥이 빠져 형식주의와 교리주의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라빠진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개혁하기 위해 바로 프랑케, 스페너등 경건주의자들이 나타났고,이 사람들은 그때 당시 이 말라빠진 신앙들을 어떻게 하면 개혁할 것인가 하고 노력했던 것이지요. 이들의 신앙의 전체적인 경향을 크게세가지로 나타낼 수 있는데, 첫째 신앙의 내면성을 강조합니다. 삶을강조하기 보다는 내면성을 강조하는데 그러다보니까 신비주의적 경향을 띄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 찬송을 강조하고 신앙의 감정적, 신비주의적 경향들이 농후했답니다. 둘째 이들은 신앙에 특히 전도에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 의해 해외 선교활동이 아주 두드러지게 되었고, 이 사람들을 기점으로 교회역사에 해외선교를 하게되고, "진전도르프"라든지 하는 유명한 신앙의 위인들이 탄생하게 된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는 건전한 개인 생활의 강조로 이들의 생활들이 아주 건전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기독교가 말라빠져버리고 형식주의화되는 상황속에서 경건주의가 나타나서 오히려 이 기독교를 매우 활성화 시키는데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아주 긍정적인 역할을했었고 지금도 우리는 경건주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경건주의가 가진 능력과 파장 때문에 사회적인 무관심, 역사적 무관심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내적인 훈련이라든지 기도생활, 전도생활 등에 대해서는 기독교에 많은 활력을 불어 넣어준 반면에 오히려 신앙이 내면화 되고 밖에는 관심이 없어졌어요.
역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아무 관계가 없다고봐요. 이런 신앙의 풍조들이 기독교안에 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생활과 기도생활을 잘 하지만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띄어 나가면서 결국은 역사에 대한 문제, 사회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게 됨으로써, 결국은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점점 소외되어 사회와는 무관한 종교로 바뀌어지기 시작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앙운동이라는 것도 균형을 잡기가 어려운 겁니다. 어는 한쪽이 몰아가면몰아갔지 이 두가지를 동시에 잘 한다는 것이 어려워요. 그 점에서 경건주의 운동이 우리 기독교 역사에 파장이 아주 큰 운동인 것입니다.
어는 한쪽에서 슬쩍 일어났다 마는 운동이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에아주 큰 파장을 일으켰고 지금도 우리들의 신앙의 깊은 뿌리속에 바로이 경건주의적 형태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즉, 경건주의적 형태의신앙 그 자체는 매우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한쪽만 강조되고 한쪽은무시됨으로써 결국은 오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회적 문제들이 환원되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막스의 등장과 함께 인간의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라고 할 정도로 중요하지만, 경건주의 영향으로 기독교 숫자는많아지게 되었지만 에 세계 역사와 세상에 무관심해지고 사회적인 면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상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대주의 신학
두번째의 원인으로 "세대주의"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들은 얼핏보면 '각자 아무 의미없이 자기 식대로하는 것이겠지'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어떤 교리적인 사상의 지배를 다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해요. 세대주의란 낱말의 뜻을 몰라서 "난 세대주의를 모르는데,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한국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겠는가"하지만 신앙을 가지고 왔던 선교사들의 신앙과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던 자들의 신앙이 그것이고 그 속에서 한국교회의 신앙이 생성 되었고, 신앙이 전수된 내용이므로 암암리에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중의 하나가 세대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대주의는 소위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네가지 견해가 나옵니다. 전천년주의,세대주의, 무천년주의, 후천년주의가 바로 그것인데, 위의 네 가지 종말론적 견해에 따라서 역사를 보는 관점과 삶의 방식이 결정됩니다.
이 네가지 견해는 역사적 종말론을 믿는 모두 보수주의자들의 생각입니다.
무천년과 후천년은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고, 반면 전천년주의와 새대주의는 예수님이 오시고 난 다음에 다시 천년왕국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하는 견해죠. 그러나 이 견해들 중 특히 문제가 되는 견해는 세대주의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한번일 줄 알고 있는데 세대주의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이 두번이예요. 예수님의 재림이 두번이라는 이유는 한번의 실패가 있다는 겁니다. 천년왕국이 끝나고 실패하여 다시 오신다그말이예요.
지금 서점에 있는 종말에 관한 책중에 99%가 세대주의입니다. 세대주의는 "예수님이 오신다"를 주장하며 언제 오시느냐 일차 목표가 198
8년이었습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수립이 되었어요. 성경에 보면"이스라엘의 수립이후 한 세대가 지나기전에 내가 오리라"고 한 구절이 있어요. 이스라엘이 독립하여서 한 새대란 말은 안나오고 이스라엘이 회복 되어서 한 세대가 나오는데, 성경의 한 세대는 보통 40년으로봅니다. 1948. 5. 20일날 이스라엘이 독립을 했다니까 1988년이 40년되는 해지요. 그 해에 세계 세대주의자들은 비상이 걸렸어요.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서 기다렸으나 오시지 않았지요.
그런데 요새는 1992년설이 퍼져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2,000년이라는 시점이예요.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10월을 비롯 2,000년이 가까워오면서 우후죽순처럼 책도 많이 나오고 교파도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 1000년전인 AD 999년 안팎에도 기도교역사적으로도 종말론 운동이 엄청났었습니다. 세대주의가 생겨난지는불과 1900년 안팎에 생겼어요.
아마 이것도 2,000년을 대비해서 생겼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날을 받아 놨다는 겁니다. 1988,1989,2000년 종말론에 대한 강조를 극단적으로 한다 그말이요. 신앙의 열심이 있는건 좋은데 곧 오시니까 기도하고 말씀읽고 사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이 세대주의라고요. 세대주의가 우리나라만큼 극성을 부리는데가 없습니다. 부흥사들은 전부 세대주의자들이라 볼 수 있는데 자기들은 신학적으로어느 분류에 들어가는지 파악을 못하므로 자기들이 세대주의자이면서도 세대주의란 말을 하면 골치아픈 신학적인 것은 다 빼버리라 이야기하죠. 세대주의의 특징은 종말에 대한 것입니다. 현재 세계의 보수주의자들의 신학적 경향은 무천년주의입니다. 유명한 학자들은 거의다무천년주의에 포진이 돼 있어요. 신학교에서도 무천년 설을 가르치는데 학생들은 세대주의거든요. 무천년을 자유주의라 몰아세우는 거예요.
위의 네가지 천년주의는 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위의 견해의 차이는 문자적 재림을 믿기는 믿는데 예수님의 오시는 상황이 어떠냐에 다를 뿐이라 이것입니다. 무천년주의자의 입장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일지는 모르는 겁니다. "때와 기한은 내게 있으나너희는 알바 아니요." 따라서 무천년 입장은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서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태도, 예수님의 재림을 분명히 믿으면서 세대주의자들은 자기식대로 오시는 예수님을 대비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유주의자라고 까지 얘기한다고요. 이것은 무식한 것이예요.
경건주의와 세대주의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해외의신학적 경향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 두가지 견해의신학적 특징을 정리하면 신앙의 내면성과 주관주의적 경향을 강조함으로 신앙을 비역사화 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신앙은 주관주의적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주관주의적 성격도 있지만 객관적 성경의계시속에서, 역사와의 관련속에서 기독교신앙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내세를 말하나 미래주의는 아닙니다. 미래주의 입장은 현재는 없고 미래만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미래성의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모두 다 부정하여 예수님의 초림으로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성과 현재성을 부정해서 성경을 크게 왜곡시켰습니다. 두번째 특징은 이원론적 경향입니다. 여기서 이원론은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있는데 첫째는 물질과 영을 둘로 나누어 버립니다. 물질과 역사 세상은 약하고, 더럽고, 영적인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선하고 아름답다는것입니다. 두번째로 시간적인 면에서 이원론은 현재와 미래를 나누어서 현재는 악하고 더럽고, 미래는 선하고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원론은 기독교사상이 아닌데도 기독교에 들어와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역사에 대한 무관심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시간적으로 현재에 대한 관심도 자연적으로 없어져 버립니다.
샤머니즘
세번째 마지막으로 한국 기독교가 무력한 원인은 무속신앙 즉 샤머니즘입니다. 학자들은 복음의 씨앗이 심겨진 토양에 있어서 샤머니즘의 긍정적인 요소, 즉 국민들 마음 가운데 종교적 심성을 주므로 무속신앙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큰 영향을 했다고 말합니다. 한편그럴 수도 있겠지요. 재미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 세대주의와 경건주의경향은 전부 미래주의적 경향과 내면주의적 경향을 띈 반면에, 이 샤머니즘은 현세주의적 경향을 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대조적이고 모순적이죠. 원래 샤머니즘은 현세주의로서 죽고난 다음의 일은 별로 관심이 없어요. 현세주의는 현세주의인데 쾌락주의적 현세주의로서 이 세상에서 산신령님이나 산신님이 오셔가지고 아들 낳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 많이 주고, 건강, 장수하게 하소서 하는 겁니다.
전자는 미래주의로, 탈역사주의로 빠지고 후자는 곧 잘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두가지가 엮어진 것이 한국기독교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에대한 무관심과 동시에 사는날 동안은 아들 딸 잘 낳고 출세해서 돈 잘벌고 하는 신앙이 형성된 것입니다. 샤머니즘의 세가지 특징은 기복신앙과 비윤리성과 탈역사성입니다. 샤머니즘의 신앙 가운데는 윤리가엾기 때문에 무조건 잘되면 좋은 것으로 과정에 대한 것이 아무것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문제는 어떠한 복이고, 어떠한삶을 우리에게 요구하는가 하는 것을 한꺼번에 생각해야 됩니다. 기복신앙에는 삶의 고난,신앙의 고난의 문제를 완전 배제해 버립니다. 무조건 잘먹고 잘살아야 축복이지 그 외의 축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말이예요.
한국에 기독교가 정착하게 된 배경
한편 3가지의 사상이 한국 기독교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생각하지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시기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1882년갑신정변과 1884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에 역사에 접촉하였습니다.
마치 밭에 씨를 부린다고 본다면 너무 거친 밭에 떨어졌습니다. 고난의 상황속에서 씨앗이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신앙의 형태가 비역사적인 신앙,내세주의 즉 이 세상의 소망이 없으므로초월적인 신앙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에 대해 새로운관점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기점으로 해서 일본이 한국을 장악했습니다. 을사조약 이후 이 땅에서는 민족, 국가에 대한 소망이 완전히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일본에 의한 신앙의 비사회화, 비역사화 운동이 시작하게 됩니다. 선교사들과 일본과의 협잡 곧 이등박문이 선교사들에게 역사성 있는 신앙을 못가르치게 하였고 그 때부터선교사들이 가르친 중요한 논리하나가 정교분리라고 하는 사상입니다.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과 또한 한국적 상황에 의해 이것을 더욱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신앙을 하는 무리들은 독립심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과 뜻있는 기독교인들과는 항상 적대적인 관계였죠. 1
907년의 한국의 부흥운동에 대한 해석도 여러가지 차원에서 하고 있는데, 최근 순수한 보수주의 입장에서도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의 역사적 상황속에서 신앙의 비역사화 운동이 하나의 피크를 이루게 된것이 1907년 부흥운동임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의 회개운동의중추적 내용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사람이 선교사들에게 잘못한 것에대한 회개운동이란 것은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1905의 을사보호조약과1907의 성령운동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너무도 곤경스러웠고, 또한 해방후엔 해방의 혼란속에 비록 미국과 소련이 들어왔지만 백가절명, 중구난방, 우후죽순으로 별 사람들이 다 나타나는 시대가 그 시대입니다. 백성들의 상황이라는 것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6.25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북쪽은 북쪽대로, 남쪽은 남쪽대로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박정희 정권 이후 남한은20년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서 물적 토대면에서는 상당한 발전을 가지고 올 수 있었지만은 그것 자체도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혼란을 가져와요. 오히려 박정희 시대로부터 하면된다는 사상을 통해서 기독교가 타락하는 한 시대가 되고 사상도 매우 현세적으로 바뀌어져요.
일제때의 최권능 목사의 신앙구호는 "예수 천당"으로 그 가운데 삶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가지고 바로 천당에 가는 거예요. 지금의 구호는 "예수 축복"이고 부흥사들도 예수 천당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구호가 바뀌어졌어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재미있는 현상중의하나입니다. 그래서 세대주의, 경건주의, 샤머니즘등 세가지 사상은한국의 역사적인 배경과 함께 꽃이 피었다 이말이예요. 그러다보니까기독교 신앙이 내세주의, 피안주의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오늘의 내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러면서도 신앙은 교조주의화 되고 인간관계,부부관계, 사회를 보는 시각은 전혀 없고요.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무기력한가'하는 원인을 경건주의, 세대주의, 샤머니즘 영향으로 보았고, 이에 대해 기독교가 기복신앙, 비윤리성, 탈역사성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우리 신앙은 기본적으로 경건주의적 형태를 가져야합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하는 등 그리고 그 중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Q.T 입니다. Q.T 를 통해 신앙과 삶의 토대가 형성되고 말씀의 적용을 하므로 큰 유익이 있습니다. 또한 Q.T 속에서 기독교 세계관적 사고를 해야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경건주의의 영향이 역사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나게 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성경적인 것도 아닙니다.
역사참여의 성경적 근거
지금까지 역사에 대한 관심, 세계에 대한 관심을 얘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역사 참여에 대한 성경의 근거 곧, 왜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되느냐?를 성경적으로 보겠습니다. 이것은 죤 스토트가 쓴 [현대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CLC간]에 잘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다섯가지로 정돈을 하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온 세상의 하나님
첫번째, 신론(하나님론)적 입장에서 기독교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책임을 가져야 되는 종교입니다. 만일 기독교신앙이 인간의 내면성에게만 관심을 갖는 종교라 한다면 그건 가짜종교입니다. 기독교인들은하나님을 구속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러나 보수주의 교회안에서 강조하는 일반적인 경우는구속의 하나님, 구원만을 해 주는 하나님, 나의 내면, 나의 개인적인삶만을 구원해 주는 하나님 만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만을 출애굽한 하나님으로만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창조의 하나님이란 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사랑하시지만은 이스라엘 만이 아니고 이세계 모든 일에 관심을 갖고 만드시고 그것을 통치하시고 세계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란 의미에서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시24:1). 그래서 아모스서에 보면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유다에가서 예언하도록 하지만 처음에 보면 유다와 이스라엘 밖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도 심판하고 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고징계를 내리신다 그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만을 다스리지 않으며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교회안에나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믿을 핑요가 없어요. 우리의 하나님은 전세계, 삼라만상을 다스리시고 창조하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신론적 차원에서 하나님은 항상 우주적 관심을 갖으며 우주적 통치를 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단지 지구속에 있는 예수 믿는 몇 사람들만 통치하는좁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에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두번째 기독론적 관점에서 보십시다. 요한복음 3장 16절[하나님이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무엇입니까? 바로, 이 세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사랑하셨어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으므로 이 세상을 구원코자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는 영지주의의 이원론과 분명한차이가 있어요. 이원론의 구원의 개념은 세상으로 부터의 탈출, 몸으로부터의 탈출이 곧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술을 많이 먹고 몽롱한 상태에 들어가요. 그러면 몸으로부터의 탈출,구원의 경지, 구원의 체험이라 이야기합니다. 기도원같은 곳에서도 술을 적당히 먹여서 도취경에 들어가게 하는 데도 있답니다. 이것은 사이비 이원론과 똑 같아요. 술이나 마약같은 것을 먹고 환각 상태로 들어가는 것과 그 환각상태 자체를 구원의 상태로 보기에 진정한 구원은인간이 죽어버리는 것이며, 몸을 떠나야 하는 거라고 봅니다. 따라서그들에겐 몸, 세상이란 저주스럽고 더러운 겁니다. 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성육신 곧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 들어 있는데,몸이 더러운 건데 하나님은 몸을 입었다는 것과 또한 동시에 하나님이역사속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속에 오시고,성육신하신 것처럼 우리도 적극적으로 가르칩니다.
우주론적 구원
세번째로는 구원론적 입장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우주적이고 사회적인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단지 사람만의 구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연 성경의 구원이 사람만의 구원입니까? 사람도 포함하지만 우주적구원입니다. 우주적 구원이란 이 삼라만상을 회복하는 거예요. 그래서성경에 보면 "피조물도 탄식하다"는 말이 나오죠. 피조물도 구속을 고대한다는 말도 있어요. 사람의 죄로 인해서 공해 즉 생태계가 파괴되듯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만의 구원이 아니고 우주적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 사람을 통해서 그리고 사람을 사용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또 이 세계를창조하셨다면 우주적 구원을 의도하시지 사람만 달랑 데려가는 구원을의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즉 기독교의 구원은 사람이 중심이 되는 구원이지만 사람을 통해서 생태계가 파괴된 것을 풀고역사가 잘못 되어진 것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구원, 새로운 우주적 갱신입니다.
세상으로 보냄받는 교회
네번째로 역사참여의 성경적 근거는 교회론입니다. 교회의 뜻은 에클레시아 즉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보통 교회라 하면 예배당 건물을 생각하나 성경에는 예배당 건물이란 말은 없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케 하옵소서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17:16-18) 말씀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란 의미는 "성육신 사건"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을 살아감으로서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 같이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세가지 전치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From the World, In Jesus Christ, Into the World. 세상으로부터불러내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다가, 세계속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이리떼 중에 양을 보내는 것과 같다.' 즉 "보내꼬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하신 것은 교회안에서 저희들끼리만 잘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역사속으로, 세계속으로, 현실속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하나님 나라의 agent 즉 하나님의 일을 하는 대행자로 묘사합니다. 교회가 그 역할을 못하니까 선교단체(paro-church)들이 일어나고 있는것입니다. 오늘 새로운 교회론적 입장에서 볼때 선교단체도 교회라고볼수도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교회인 것입니다.
유기체로서의 인간
마지막 다섯번째로 인간론적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영과 육으로, 영혼과 몸으로 구별시킬 수 없는 것이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이 둘은 나눌수가 없습니다. 이분설, 삼분설은 엄밀히 존재치 않습니다. 인간을분리시키는 것은 벌써 헬라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손, 눈등의 사람의 육체적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신인동형적 표현"으로서 그분의 인격이 나타났다는 거죠. 또 성경에는 "내 창자가 끊나이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창자가 끊는다"는 표현이 아니고 "내 인격 전체가 혼과 영혼이 주님을 향해서 온전히 되집어 진다"는 표현이예요.
성경에서는 몸과 마음을 구별시키질 않고 한 덩어리로 봅니다. 사람을몸과 마음으로 구별한다는 것은 죽는거요. 또 인간을 구별할 수 없고몸과 마음은 매우 밀접한 유기적 관계를 갖는다고 하는 것이 현대과학에 의해서 증명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인간을 유기체로 이해를 해야지, 살덩어리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현재 유럽의 폴트르니에를 중심해서 일어나는 "인격 의학"은 육체적 질병으로 부터 정신적인 것까지대화를 통해서 치료해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관절염은 단지 많이 걸어다녀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일어나는 관절염이고,또 마음이 아프면 두통이 일어나고, 그래서 인간에겐 몸과 마음이라고하는 것은 도무지 구별 시킬수가 없는 거예요. 역사는 보이는 신체하고 똑같은 겁니다.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인간론적 유추를 가지고 사회도 관심을 가져야 될 부분입니다.
사랑에는 플라토닉 러브, 돈주앙 러브, 아가서의 사랑등 세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플라토닉 러브란 말이 참 유행하여 사랑을 하려면 플라토닉 러브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몸은 더러운 것이라 보는 거죠. 김 용옥 교수는 '플라토닉 러브란말 가운데서만큼 헬라철학의 사상일 잘 드러난 낱말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반면 돈주앙 러브는 정신은필요없이 몸으로만 하는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세번째 기독교적인 사랑은 아가서의 사랑, 즉 몸과 마음이 함께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회적 관심과 사회 참여는 영혼과 육체의 전인을 위하므로 근거를제공합니다.
정리하면 신론에서 창조의 하나님, 기독론에서 성육신의 예수님, 구원론에서는 우주적 구원, 교회론에서 Form the world, into the world, 인간론에서 인간은 유기체라는 유추에 의하여 사회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