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사람들 룻기1:1-5
우리는 앞시간에
룻기 1장 1절에서 5절을 읽었습니다.
그때는 1절과 2절을 중심으로해서
"엘리멜렉"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 다음 부분인
3절과 4절,5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는 아무래도
우울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본문내용이 그러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항상 좋은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울한 이야기도 간혹 듣고,
또 그러는 것이 이로울 때도 있습니다.
더우기 요즘처럼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많은 때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은 나몰라라하고
우리만 즐거워 할 수는 없습니다.
우울한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시간도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죽음의 이야기
룻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아픔이나 슬픔이 없이
그저 모든 것이 평화롭고 기쁨이 넘치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룻기는 예상 밖의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흉년과 죽음.
이 두 낱말은
룻기 처음 부분에서 만나게 되는
충격적인 단어들입니다.
특히 룻기 1장 3절과 4절,5절은
죽음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죽음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룻기를 펴는 순간,
우리는
행복한 이야기가 아닌,
흉년과 죽음의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음산한 흉년에서 이어지는
비극적인 죽음의 이야기.
룻이 살던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집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죽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제도 듣고,오늘도 듣고,
그리고 내일도
우리는
죽음의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티비에서,신문에서,
그리고 시내 곳곳에 우뚝 서 있는
교통사고 현황탑에서,
급하게 달려가는
엠블런스의 싸이렌 소리에서,
우리는 죽음의 소식을 듣습니다.
매일처럼 듣게 되는 죽음의 소식들.
이렇듯 우리는
죽음의 소식을 접하며 살아가고 있고,
죽음은 언제나 우리들 주변에 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죽음의 소식을 전해듣고 있습니다.
매일매일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의 소식을
생생하게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검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몇해전에 위도 앞바다에서
서해 훼리호가 침몰했습니다.
이 사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250여명.
얼마나 많은 사람들인가요?
이곳에 앉아 있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도 앞바다에서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의 소식을
한참이나 들어야 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 곳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신문과 티비는
산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삶의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지만,
그러나
죽음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죽음의 이야기가 빠진 신문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문과 티비에서 읽는 죽음의 이야기를
룻기1장에서도 읽게 됩니다.
룻기1장 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아들이 남았으며.
그리고 5절을 읽겠습니다.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룻기 1장 1절에서 5절은
세번의 죽음의 이야기입니다.
엘리멜렉이 죽고,
말론이 죽고,
그리고 기룐이 죽습니다.
우리는 룻기를 읽으면서,
연이은 죽음의 소식을 듣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만해도
여러 죽음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극적인 사고가 아니라고 해도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이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그 소식의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삶만을 생각합니다.
서해 훼리호를 탔던 사람들,
삼풍백화점에 있었던 사람들.
성수대교를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죽기 위해서
거기에 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그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그림자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사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들은
잠시후면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도 생각하고
모래도 생각하고
내년도 생각하고
십년 뒤도 생각하고,
그렇게
사는 생각만 했습니다.
엘리멜렉,말론,기룐.
그들도 사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지독한 흉년이 든
이 이스라엘 땅에서는 살 수 없지만,
모압땅에 가면 살 수 있다.
그곳에 가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희망을 안고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 땅에 도착한지
10년이 지나지 못해서
남자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이 모압으로 갈 때에는
부푼 꿈을 안고 갔을 것입니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한 삶대신
그들에게는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살기 위해서 간 그들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압은 삶의 땅이 아니고
죽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모압은 그들의 묘지가 되었습니다.
250여명의 주검을 안고
갯펄에 모로누운 훼리호는
더 이상 삶의 배가 아니고
죽음의 배가 되었습니다.
그 배를 탔던 사람들.
그들은 엘리멜렉의 가족처럼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맞이한 것은
공포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은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모압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말론과 기룐이
아직 장가들기 전에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엘리멜렉은
모압에 도착한지 몇해 지나지 않아서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장가를 안간 것을 보면,
엘리멜렉은 40세가 안되었을 것입니다.
모압생활이 얼마나 힘이 들었길래
30대의 젊은 사람이
몇해 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단 말입니까?
우리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말론과 기룐은
그곳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희망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새로운 삶이 아니고,
생명이 아니고
역시 죽음이었습니다.
말론이 죽고,
그리고 기룐도 죽었습니다.
말론과 기룐이
자식이 없이 죽은 것을 보면,
그들도 결혼해서 몇해 안되어서
세상을 떠난 모양입니다.
그곳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20살을 갓넘겼을 그 젊은이들이
세상을 떠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죽음,또 죽음.
룻기는 이렇듯 죽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2.죽음의 고통
세 사람의 죽음의 소식을 전하는
룻기의 처음 부분을 읽어가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모압에서의 삶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살아보겠다고 그곳에 간 사람들이
10년이 채 지나지 못해서 다 죽었을까?
우리는
모압에서의 삶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성경에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참으로 고통스러웠으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건장한 남자들을 죽게 만드는 그곳,
모압에서 엘리멜렉의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오죽하면 10년이 되지 않아서
세 남자가 다 죽었겠습니까?
그 10년이 그들에게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죽음의 고통을
점점 더 깊게 맛보아야 하는 그 모순된 모습.
룻기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아픔입니다.
서해 훼리호가 물 속에 빠져서
갯펄에 잠겼을 때,
그곳에 탔던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은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문과 티비를 통해서
그들의 최후의 모습을 전해들었습니다.
잠수부들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한곳으로 몰려서 엉켜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갑작스런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이를 꼭끌어안고 죽은 여인.
죽음 앞에서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손을 꽉잡고 죽은 부부.
안타까운 몸부림.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
그순간에 그들만이 겪었던 고통입니다.
누구도 그들과 함께
그 고통을 나눌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그렇고,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도
그랬을 것입니다.
모압땅은 다른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모압땅입니다.
엘리멜렉은
모압땅에 돈을 벌려고 갔습니다.
외국인 노동자입니다.
그곳에 아주 살려고 간 것이 아닙니다.
우거하려고 갔습니다.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돈을 벌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살아서는 모압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모압만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엘리멜렉들이 많습니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온 조선족들이
이 시대의 엘리멜렉들입니다.
외국에서 이곳으로 돈벌러 왔다가
이곳에서 비참하게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사는 이곳이
바로 모압땅입니다.
그들은 이곳을 삶과 희망의 땅이라 믿고 왔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삶과 희망의 땅이 아니고,
죽음과 고통과 절망의 땅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곳을 모압땅으로 만들고
수많은 엘리멜렉들을 만들어낸
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어서
이곳이 모압땅이 되도록 한 죄도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곳이 더 이상
모압땅,
죽음의 땅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죽음 뒤에 남은 사람들
3절과 5절을 보면,
두 구절이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남았으며.
뒤에 남았더라.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말론과 기룐이 죽고
나오미와 오르바와 룻이 남았습니다.
죽음의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언제나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것도 역시
살아있는 자들의 몫입니다.
엘리멜렉이 죽고 난 다음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의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암담했을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두 아들이 죽고난 다음에
나오미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듯이 아팠을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나오미는 세 번의 죽음을 겪습니다.
남편의 죽음과 두 아들의 죽음.
남편을 땅에 묻는 아내의 심정.
두 아들을 하나씩 땅에 묻는 어머니의 심정.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더욱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룻기 1장 3절에서 5절에는
깊은 슬픔이 베어 있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
남은 사람의 마음아파함.
러시아 모스크바에 가면
전쟁기념관이 있습니다.
그곳에 여러 가지 것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인상깊은 하나 있었습니다.
기념관 1층 천정에
금목거리줄같은 것이
수도 없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하얀 수정들이 달려있었습니다.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해준 분이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 목거리줄같은 것이
모두 몇 개냐 하면
이천칠백만개라는 것입니다.
말이 이천칠백만개지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그런데
왜 이천칠백만개나 되는 금줄을
천정에 매달아 놓았을까요?
2차대전때
독일이 러시아를 쳐들어왔는데,
그때 러시아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이
모두 이천칠백만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기리기 위해서
이천칠백만개의 줄을 매달아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매달려 있는 수정은
눈물방울을 상징하는 것이랍니다.
홀 가운데에는
대리적 조각이 있는데,
어머니가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머니는 러시아를 상징하고
아들은 전쟁에서 죽은 청년들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전주에서 여기오다보면
왼쪽으로
천주교 공동묘지가 있지요?
거기에 하얀 조각품이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죽은 자식을 안고 있는 어머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나오미도 그랬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의 주검을 안고
통곡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런데 그들의 죽음 뒤에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편과 친척,형제,자매,
부모,자식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는 사람들.
엄청난 슬픔 앞에서
눈물도 말라버린 사람들.
목이 쉬어서 울지도 못하는 사람들.
슬퍼할 기력마저 잃어버린 사람들.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봅니다.
사람은 혼자서 울고 태어나서는
많은 사람들을 울리면서
세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싸늘한 주검을 바라보면서
남은 자들이 슬퍼하는 모습.
우리는 그 모습들을
티비에서 신문에서 계속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도
그들의 죽음 뒤에 남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해야 합니다.
함께 슬퍼하는 곳.
그곳은 더 이상 모압이 아닙니다.
우리는 앞시간에
룻기 1장 1절에서 5절을 읽었습니다.
그때는 1절과 2절을 중심으로해서
"엘리멜렉"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 다음 부분인
3절과 4절,5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는 아무래도
우울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본문내용이 그러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항상 좋은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울한 이야기도 간혹 듣고,
또 그러는 것이 이로울 때도 있습니다.
더우기 요즘처럼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많은 때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은 나몰라라하고
우리만 즐거워 할 수는 없습니다.
우울한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시간도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죽음의 이야기
룻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아픔이나 슬픔이 없이
그저 모든 것이 평화롭고 기쁨이 넘치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룻기는 예상 밖의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흉년과 죽음.
이 두 낱말은
룻기 처음 부분에서 만나게 되는
충격적인 단어들입니다.
특히 룻기 1장 3절과 4절,5절은
죽음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죽음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룻기를 펴는 순간,
우리는
행복한 이야기가 아닌,
흉년과 죽음의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음산한 흉년에서 이어지는
비극적인 죽음의 이야기.
룻이 살던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집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죽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제도 듣고,오늘도 듣고,
그리고 내일도
우리는
죽음의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티비에서,신문에서,
그리고 시내 곳곳에 우뚝 서 있는
교통사고 현황탑에서,
급하게 달려가는
엠블런스의 싸이렌 소리에서,
우리는 죽음의 소식을 듣습니다.
매일처럼 듣게 되는 죽음의 소식들.
이렇듯 우리는
죽음의 소식을 접하며 살아가고 있고,
죽음은 언제나 우리들 주변에 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죽음의 소식을 전해듣고 있습니다.
매일매일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의 소식을
생생하게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검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몇해전에 위도 앞바다에서
서해 훼리호가 침몰했습니다.
이 사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250여명.
얼마나 많은 사람들인가요?
이곳에 앉아 있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도 앞바다에서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의 소식을
한참이나 들어야 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 곳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신문과 티비는
산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삶의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지만,
그러나
죽음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죽음의 이야기가 빠진 신문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문과 티비에서 읽는 죽음의 이야기를
룻기1장에서도 읽게 됩니다.
룻기1장 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아들이 남았으며.
그리고 5절을 읽겠습니다.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룻기 1장 1절에서 5절은
세번의 죽음의 이야기입니다.
엘리멜렉이 죽고,
말론이 죽고,
그리고 기룐이 죽습니다.
우리는 룻기를 읽으면서,
연이은 죽음의 소식을 듣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만해도
여러 죽음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극적인 사고가 아니라고 해도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이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그 소식의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삶만을 생각합니다.
서해 훼리호를 탔던 사람들,
삼풍백화점에 있었던 사람들.
성수대교를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죽기 위해서
거기에 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그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그림자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사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들은
잠시후면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도 생각하고
모래도 생각하고
내년도 생각하고
십년 뒤도 생각하고,
그렇게
사는 생각만 했습니다.
엘리멜렉,말론,기룐.
그들도 사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지독한 흉년이 든
이 이스라엘 땅에서는 살 수 없지만,
모압땅에 가면 살 수 있다.
그곳에 가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희망을 안고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 땅에 도착한지
10년이 지나지 못해서
남자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이 모압으로 갈 때에는
부푼 꿈을 안고 갔을 것입니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한 삶대신
그들에게는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살기 위해서 간 그들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압은 삶의 땅이 아니고
죽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모압은 그들의 묘지가 되었습니다.
250여명의 주검을 안고
갯펄에 모로누운 훼리호는
더 이상 삶의 배가 아니고
죽음의 배가 되었습니다.
그 배를 탔던 사람들.
그들은 엘리멜렉의 가족처럼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맞이한 것은
공포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은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모압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말론과 기룐이
아직 장가들기 전에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엘리멜렉은
모압에 도착한지 몇해 지나지 않아서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장가를 안간 것을 보면,
엘리멜렉은 40세가 안되었을 것입니다.
모압생활이 얼마나 힘이 들었길래
30대의 젊은 사람이
몇해 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단 말입니까?
우리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말론과 기룐은
그곳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희망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새로운 삶이 아니고,
생명이 아니고
역시 죽음이었습니다.
말론이 죽고,
그리고 기룐도 죽었습니다.
말론과 기룐이
자식이 없이 죽은 것을 보면,
그들도 결혼해서 몇해 안되어서
세상을 떠난 모양입니다.
그곳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20살을 갓넘겼을 그 젊은이들이
세상을 떠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죽음,또 죽음.
룻기는 이렇듯 죽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2.죽음의 고통
세 사람의 죽음의 소식을 전하는
룻기의 처음 부분을 읽어가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모압에서의 삶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살아보겠다고 그곳에 간 사람들이
10년이 채 지나지 못해서 다 죽었을까?
우리는
모압에서의 삶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성경에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참으로 고통스러웠으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건장한 남자들을 죽게 만드는 그곳,
모압에서 엘리멜렉의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오죽하면 10년이 되지 않아서
세 남자가 다 죽었겠습니까?
그 10년이 그들에게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죽음의 고통을
점점 더 깊게 맛보아야 하는 그 모순된 모습.
룻기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아픔입니다.
서해 훼리호가 물 속에 빠져서
갯펄에 잠겼을 때,
그곳에 탔던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은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문과 티비를 통해서
그들의 최후의 모습을 전해들었습니다.
잠수부들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한곳으로 몰려서 엉켜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갑작스런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이를 꼭끌어안고 죽은 여인.
죽음 앞에서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손을 꽉잡고 죽은 부부.
안타까운 몸부림.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
그순간에 그들만이 겪었던 고통입니다.
누구도 그들과 함께
그 고통을 나눌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그렇고,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도
그랬을 것입니다.
모압땅은 다른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모압땅입니다.
엘리멜렉은
모압땅에 돈을 벌려고 갔습니다.
외국인 노동자입니다.
그곳에 아주 살려고 간 것이 아닙니다.
우거하려고 갔습니다.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돈을 벌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살아서는 모압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모압만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엘리멜렉들이 많습니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온 조선족들이
이 시대의 엘리멜렉들입니다.
외국에서 이곳으로 돈벌러 왔다가
이곳에서 비참하게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사는 이곳이
바로 모압땅입니다.
그들은 이곳을 삶과 희망의 땅이라 믿고 왔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삶과 희망의 땅이 아니고,
죽음과 고통과 절망의 땅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곳을 모압땅으로 만들고
수많은 엘리멜렉들을 만들어낸
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어서
이곳이 모압땅이 되도록 한 죄도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곳이 더 이상
모압땅,
죽음의 땅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죽음 뒤에 남은 사람들
3절과 5절을 보면,
두 구절이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남았으며.
뒤에 남았더라.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말론과 기룐이 죽고
나오미와 오르바와 룻이 남았습니다.
죽음의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언제나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것도 역시
살아있는 자들의 몫입니다.
엘리멜렉이 죽고 난 다음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의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암담했을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두 아들이 죽고난 다음에
나오미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듯이 아팠을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나오미는 세 번의 죽음을 겪습니다.
남편의 죽음과 두 아들의 죽음.
남편을 땅에 묻는 아내의 심정.
두 아들을 하나씩 땅에 묻는 어머니의 심정.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더욱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룻기 1장 3절에서 5절에는
깊은 슬픔이 베어 있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
남은 사람의 마음아파함.
러시아 모스크바에 가면
전쟁기념관이 있습니다.
그곳에 여러 가지 것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인상깊은 하나 있었습니다.
기념관 1층 천정에
금목거리줄같은 것이
수도 없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하얀 수정들이 달려있었습니다.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해준 분이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 목거리줄같은 것이
모두 몇 개냐 하면
이천칠백만개라는 것입니다.
말이 이천칠백만개지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그런데
왜 이천칠백만개나 되는 금줄을
천정에 매달아 놓았을까요?
2차대전때
독일이 러시아를 쳐들어왔는데,
그때 러시아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이
모두 이천칠백만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기리기 위해서
이천칠백만개의 줄을 매달아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매달려 있는 수정은
눈물방울을 상징하는 것이랍니다.
홀 가운데에는
대리적 조각이 있는데,
어머니가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머니는 러시아를 상징하고
아들은 전쟁에서 죽은 청년들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전주에서 여기오다보면
왼쪽으로
천주교 공동묘지가 있지요?
거기에 하얀 조각품이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죽은 자식을 안고 있는 어머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나오미도 그랬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의 주검을 안고
통곡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런데 그들의 죽음 뒤에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편과 친척,형제,자매,
부모,자식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는 사람들.
엄청난 슬픔 앞에서
눈물도 말라버린 사람들.
목이 쉬어서 울지도 못하는 사람들.
슬퍼할 기력마저 잃어버린 사람들.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봅니다.
사람은 혼자서 울고 태어나서는
많은 사람들을 울리면서
세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싸늘한 주검을 바라보면서
남은 자들이 슬퍼하는 모습.
우리는 그 모습들을
티비에서 신문에서 계속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도
그들의 죽음 뒤에 남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해야 합니다.
함께 슬퍼하는 곳.
그곳은 더 이상 모압이 아닙니다.
출처 : 천성을 향하여
글쓴이 : 하늘 군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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