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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은혜로 사는 자의 모습 창 9:20-27, 고전 15:9-11

힘찬 발걸음 2010. 10. 17. 01:34

             은혜로 사는 자의 모습         창9:20-27, 고전15:9-11

  옛날에 박만득이라는 백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두 양반이 그에게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그 중 한 양반은 습관대로 "야, 만득아! 고기 한 근 다오"라고 말했습니다. 만득은 "네"하며 고기를 한 근 내 주었습니다. 다른 양반은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게"라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는 언뜻 봐도 먼저 산 양반의 것보다 훨씬 더 커 보였습니다. 똑같이 한 근이라고 말했는데 차이가 많이 나자 앞의 양반이 화가 나 따졌습니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이 양반의 것은 많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적으냐?" 그러자 만득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님 것은 만득이가 자른 것이고, 저 손님 것은 박서방이 자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때로는 한 마디 말이 그 어떤 치료약보다 효험을 발휘해 생명을 구하고, 또 때로는 비수가 되어 남의 마음을 도려내기도 합니다. 그 결과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아버지 노아의 술 취한 모습을 보고 말한 함의 말과 셈과 야벳의 말이 그들의 인생을 결정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 하는 말과 사는 모습이 달라야 합니다.

  오늘은 창9:20-27, 고전 15:9-11의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로 사는 자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은혜로 사는 자의 모습은


  1.은혜를 바로 알고, 항상 은혜 안에서 살아갑니다.

   1)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는 자로 삽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기를 힘씁니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은혜 입은 것을 잊지 않고 보답하려 했습니다.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목숨 걸고 도와주었던 요나단의 은혜를 잊지 않고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 두 다리를 저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왕자처럼 대우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모반을 받고 피난길에 오를 때 은혜를 베푼 바르실레에 대해 반역이 수습 되었을 때 은혜 보답하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암몬이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암몬의 왕 나하스에게 입었던 은혜를 잊지 않고 그가 죽었을 때 신하를 보내어 조상하고 아들 하눈에게 그 은혜를 갚으려는 내용이 사무엘 하 10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항상 그런 자세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본문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이 장면에서 함은 노아의 수치를 다른 형제들에게 알림으로 저주받는데 이 장면은 남의 허물을 드러내 수군수군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잘 알려줍니다. 모르는 남들이 비판하고 수군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가족과 교우, 그리고 친구와 동료 사이에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함은 더욱 그래야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노아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함이 대 홍수에서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그의 아버지 노아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노아는 자신에게 두 번 생명을 준 인생 최대의 은인입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아버지에게 본문처럼 행동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은혜를 아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배신하는 일만은 없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제일 나쁜 행동은 배은망덕입니다.

   성도는 나를 위해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생명까지 주신 주님의 은혜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늘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은혜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와 목사, 스승의 은혜도 잊지 말고, 자기에게 일거리를 준 회사 사장, 이웃에게 크고 작은 은혜를 입었을 때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보호 합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다 세상 일, 육의 일에 치우쳐 살았습니다. 노아가 그러한 세상 풍조에 휩쓸려 살 수 박에 없는 환경 가운데서 주변 환경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인생 지으셨음을 한탄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창세기 6:8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했습니다.

  용인 에버랜드에 있는 사파리(동물들을 풀어 논 곳에서 차를 타고 구경하는 것)란 곳에 보면 차를 타고 사자와 사나운 동물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구경합니다. 사나운 동물들 속에 있긴 하지만 차 안에 있기도 하며 보호받고 있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은혜 안에 있는 성도들은 위험과 고난과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신약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 역시 주님을 만난 후 주와 복음을 위해 살면서 수많은 박해와 시련과 위태한 일을 만났지만 그 때 마다 주님의 은혜가 그를 감싸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돌에 맞아 피투성이 되어 쓰러졌을 때에도, 무리들이 그를 죽이려고 성 문에서 지키고 있을 때에도, 배를 타고 “유라굴로” 라는 태풍을 만나 사경을 헤맬 때에도, 유대 동족들이 그를 죽이려고 매복해 있을 때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 박해의 현장에 다시 들어갔을 때에도 항상 주님의 은혜가 그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때로, 믿는 자들을 통해, 천부장과 백부장을 통해, 생질을 통해, 동역 자들을 통해 돕는 자들을 세우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 것입니다.

   3)절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은 자라도 자만할 자는 없습니다. 바울은 섯다 하는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고, 은혜를 아는 다윗도 왕 위에 오르고 나서 큰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본문 20-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이 모습을 보면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라는 말이 무색해집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홍수 이후에 노아가 갑자기 타락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이 모습이 노아의 원래 모습입니다. 노아도 상대적 의미에서 의인일 뿐, 그도 역시 죄인입니다. 의인이란 ‘행위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믿음 안에서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특히 본문은 금주 문제와 관련해서 많이 논의되는 본문입니다. 본문에서 노아가 포도주를 먹은 것, 즉 술을 먹는 것이 죄가 될까요? 죄라는 주장도 있고, 죄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한 술을 먹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취하도록 먹으면 죄가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떤 주장 옳을까요? 엄밀히 말해서 포도를 먹는 것이 죄가 아니듯이 포도가 발효된 포도주를 먹는 것이 꼭 죄는 아닙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포도주의 유익을 말합니다. 사사기 9장 13절을 보면 포도주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언급이 있고, 시편 104편 15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주셨다고 하고, 잠언 31장 6절에는 근심하는 자에게 포도주를 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고(딤전 5:23), 창세기 27장 28절 말씀을 보면 포도주는 축복의 상징으로 사용되었고, 잠언 9장 5-6절에는 포도주가 생명과 명철을 준다는 말씀이 있고, 이사야 25장 6절에는 하나님이 마련한 연회에서 오래 저장한 맑은 포도주를 베푸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성찬식 때 포도주를 사용하셨고, 마태복음 26장 29절에는 장래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도는 주님과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은 첫 번째 기적으로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베푸셨고, 마태복음 11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이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란 별명을 가졌는데, 그것을 보아 예수님도 포도주를 즐기셨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제는 절제하는 자세를 갖지 못하면 술에 취해 방탕해지기 쉽고, 죄와 허물에 노출되기 쉬우며,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술로 인해 다툼과 음주 운전 피해 등으로 건덕 상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노아도 절제하지 못한데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절제 하는 생활로 은혜를 욕되게 하지 않는 성도가 됩시다.


 2.은혜로 사는 자의 모습은 겸손히 주님을 높이며 삽니다.

   1)바울은 어느 누구보다 큰일을 많이 하고, 고난도 많이 받았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12:11)했습니다. 바울은 3차에 걸쳐 세계 전도여행을 하며 복음을 전했고, 많은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1차 전도여행은 바나바와 마가 등 일행과 함께 먼저 구브로 섬에 건너가 섬 전체를 순회하고, 그 후 소아시아에 건너가 밤빌리아의 버가, 비시디아의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했습니다. 전도 중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아 마가는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동행하는 일을 포기하기까지 했습니다. 2차 전도여행은 바울이 실라와 루스드라에서 합류한 디모데, 또 도중에 만난 누가 등과 함께 했으며, 바울은 드로아에서 환상에 한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에게 나타나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청함으로 순종하여 구라파 땅에 전도하는 게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그리고 고린도로 가서 전도한 내용이 사도행전 16:1-18:22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전도할 때 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로 가는 곳마다 훼방을 받았습니다. 빌립보에서는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제 3차 전도여행에서 소아시아 전도, 특히 에베소에 3년간이나 머물면서 전도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전도 여행 중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는 말에서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충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후에 심한 박해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왔다가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서 옥에 갇혀 있는 중에 많은 사람들을 전도 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주와 복음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치면서 죽기까지 충성을 다 하다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2)그러한 그는 지극히 작은 자요, 만삭되지 못해 난 자와 같다했습니다. 만삭되기 못하여 난자란 좀 모자란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스스로 큰 자라 생각하고 자기 외에는 없는 것처럼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였지만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은 후에는 지극히 겸손한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하였습니다. 바울이란 이름 자체도 작은 자입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에 바울만큼 큰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 같이 수제자의 자리에 있지도 않았고, 야고보와 같이 예루살렘 회의를 주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부귀영화를 모두 내 버리고 말로 할 수 없는 가진 고난을 다 겪었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 사울로 그대로 살았더라면 큰 자가 되었을 뻔 했지만 주님 만나 바울이 되고 난후 보잘 것 없는 작은 자로서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을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까지 당하여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고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과 주리고 목마름, 춥고 헐벗기 까지 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노라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계인사, 심지어 이단의 평신도까지 성경을 통달한 것처럼 말합니다. 능력의 종, 말씀의 종, 세계적인 종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자기 외에는 그런 사람이 없는 듯 표현합니다. 어찌 하나님의 세계를 인간의 작은 두뇌로 다 헤아릴 수 있으며, 입술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의 봉사와 헌신과 열심이 최고인양 자기를 들어내고, 자랑하는 너무 교만한 자의 모습을 가지고 믿음 생활 하는 위험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사는 성도는 바울과 같이 아무리 큰일을 하고, 복음을 위해 수고했을 지라도 나는 지극히 작은 자요, 만삭되지 못해 난자와 같다고 말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자랑하고 전하는 자가 됩니다.

   3)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하였습니다. 바울 정도라면 능히 혼자서라도 큰 인물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있었습니다. 태어난 신분도 좋을 뿐 아니라 학식도 풍부하고 고난을 감수하며 한 전도 여행을 볼 때 그 의지력도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비범함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영광으로 돌려도 흠 잡을 데가 없었지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하였습니다. 10절에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위해 많은 수고를 했으나 참고 견딘 것도, 열매를 거두게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느낄 때 자만이나 교만을 가질 수 없었고, 오직 감격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일수록 더욱 겸손해집니다. 그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는 대 사도의 겸손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말년에 교만하여 망하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 사도도 사울이라는 이름가지고 교만하여 주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지만 다메섹에서 부서져 교만이 깨어진 것입니다. 그가 예수 믿고 20년 후에 쓴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 보면 사도 중에 작은 자라고 하였더니, 그 후 3여년 후에 쓴 에베소서 3장 8절에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하였고 그의 말년에 쓴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더욱더 작은 자가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은혜가 더 풍성해질수록 더 겸손한 자가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도 말하기를 모든 덕의 기초는 겸손이라 하였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제자가 세상의 제일 좋은 덕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에 겸손이라 하였습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둘째도 겸손이다.” 그러면 셋째는 무엇입니까 하니 “셋째도 겸손이라” 하였습니다. 존 플레처(John Fletcher)란 사람은 그의 제자가 묻기를 하나님께서 선생님에게 기도 응답으로 꼭 한 가지만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는데 선생님은 어찌하렵니까? 하니 “겸손을 구하지.” 한 가지 더 주시다면? “또 겸손이지.” 한 가지를 더 주신다면? “또 겸손을 구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은혜 받고 겸손하여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은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성도로 삽시다.


 3.은혜로 사는 자의 모습은 은혜를 베풀며 살아갑니다.

   1)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내는 자가 되었습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발가벗은 모습을 보고 두 형제 샘과 야벳에게 조롱하는 태도로 고했습니다. 아버지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잊지 않았다면,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이 있었다면 그런 뻔뻔함과 불효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함의 그러한 행동으로 보아 매우 조심성이 없고, 배은망덕하고, 경거망동한 자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매우 큰 잘못이며 실수였습니다. 아버지가 비록 포도주로 취해 있었지만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정도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러한 아버지의 덕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온 가족이 홍수 심판에서 구원 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배은망덕한 자가 되었고, 의인의 수치를 드러내는 자가 되었습니다.

  악인들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행한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책망하고 돌이키도록 경종해야 하지만 악한 의도가 없이 의인의 실수로 행한 일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허물을 덮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허물이 없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도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요17장에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허물이 많은 제자들이라도 덮어주고, 변명해 주고, 믿어주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주님 앞에 데리고 와서 이런 여인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을 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 하시니 하나씩 둘씩 다 떠나고 여인만 남았을 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안 는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 하시며 돌려 보내셨습니다.

  참된 회개를 한 사람은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도 기뻐하지 않는 법입니다. 더욱이 마땅히 공경해야 할 자기 부모의 과오를 드러낸 것은 너무 야비하고 불성실한 큰 잘못입니다.

   2)샘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었습니다. 함으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말을 듣고 함과는 달리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권위가 떨어지지 않도록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서 뒷거름으로 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가렸습니다. 평소에 그들이 간직하고 있던 아버지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겸손과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으려 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지 못하도록 덮을 것을 마련하여 뒷걸음해서 아버지의 벗은 몸을 가려 주었습니다. 잠10:12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했습니다. 잠17:9에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했습니다.  

  어떤 이에 대한 일을 다른 사람이 알아서 하나라도 좋을 것이 없을 경우 알리지 않는 것을 삶의 귀중한 원칙으로 세워 놓아야 합니다. 더욱이 그 일이 부모의 일일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3)은혜로 사는 사람은 은혜를 보답하고, 베풀며 삽니다. 함은 은혜를 받고 배은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술에서 깨어 낳을 때 술에 취했을 때 일어난 일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의 행동을 알고 함의 장자인 가나안에게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후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출애급 사건 이후 가나안 족속은 여호수아에게 정복됨으로 멸망을 당하고 남은 자들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셈을 인하여 찬송하며 여호와를 셈의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하나님의 온갖 축복의 영역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자기 아버지 노아에 대한 셈의 효성은 보상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노아는 하나님은 야벳을 창대케 하셔서 셈의 장막에 거하리라고 축복을 빌었습니다. 하나님은 야벳을 축복하시어 자손을 창대케 하고 그의 영토를 넓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며 사는 자들에게 더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은혜로 사는 바울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사랑의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복음의 일꾼이 되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주님 안에서 구원을 받게 하려고 고난 중에도 주님 사랑을 믿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은 더욱 사랑하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시어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어느 장군의 아홉 살 난 귀여운 딸이 밖에 나가 놀다가 낯선 손님으로부터 선물을 하나 받아들고 자기 아버지 앞에 가서 자랑을 했습니다. 그 선물은 보석 상자였습니다.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더니 딸에게 - “그 보석 상자를 내다 버리거라.” 딸은 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딸은 울먹이면서 - “아버지가 언제 이렇게 좋은 선물을 내게 주어 봤어요, 왜 이걸 버리라고 하는 거예요” 따지듯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 또 그것을 믿을 수 있지?” - “그래요” - “그렇다면 내 말대로 내다 버려라” 아버지의 권고를 듣고 이 아이는 결국 이 상자를 밖에 내다 버리고 돌아왔는데 얼마 후에 그 상자가 꽝하고 터지는 폭발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그 장군을 살해하기 위해서 어린 아이의 손에 들려 들여보낸 시한폭탄이었다. 딸이 아버지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하여 듣지 않고 보석 상자를 버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시한폭탄에 터져 다 죽고, 온 가정이 풍지 박산에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보석 상자를 버렸기 때문에 죽음과 불행을 모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딸이 보석 상자를 어떻게 버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보석 상자를 버리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로 사는 자의 모습은 은혜를 바로 알고, 항상 은혜 안에 살아갑니다. 주님 은혜가 항상 나를 보호하심을 알고, 은혜를 잊지 않고, 절제하는 자세를 가지고 사라갑니다.  ♡겸손히 주님을 높이며 삽니다. 주를 위해 아무리 큰일을 하고 고난을 많이 받아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나의 나 된 것 하나님 은혜라고 고백하며 삽니다.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고, 은혜를 베푸는 사람으로 삽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 은혜로 사는 자의 모습을 가지고 은혜를 보답하며, 받은 은혜를 베푸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2010. 10. 10. 성산교회 >

* 다움 카페 "땅끝 사랑 선교회" 에 은혜롭고 유익한 글들 많이 올려 놓았습니다. 활용 하세요.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임방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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