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인생은 영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

힘찬 발걸음 2010. 5. 28. 00:05

 

09/11/17/화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성장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떻게 나아가는 것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 인생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은혜의 시기, 연단과 훈련의 시기, 열매와 성숙의 세 가지 시기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인생이 초년기, 중년기, 노년기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그 비슷한 과정을 거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살다가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을 떠나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성도의 영적 여정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 대해서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책으로 내겠지만, 어느 세월에 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느냐는 독자님들을 위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은혜의 시기는 애굽의 시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애굽을 나오지 않고 애굽에 있는 상태, 이것을 영적으로는 은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은 육과 자아의 본성을 따라 사는 시기입니다. 이 상태는 자연인이며 본능적인 가치관과 삶을 사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아직 동물의 몸을 벗지 못한 시기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없는 상태이며 무엇이 진리인가에 관심이 없고 그저 누가 내 편인가, 누가 나를 사랑해주는가에만 관심을 가지는 시기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며 편안한, 그러한 본능적인 삶을 가장 기뻐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때는 아직 말씀이 없습니다. 말씀은 광야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때는 아직 말씀을 먹지 못합니다.

기도를 하면 울 수도 있고 찬양을 통해서 감동을 받을 수도 있으며 감동적인 예화를 들으면 가슴에 충격을 먹을 수도 있지만 진리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면 다들 졸거나 잠을 잘 것입니다. 아직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영이 형성되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은혜의 시기이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능력과 기적과 은총이 임하는 시기입니다. 바로는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지만,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노예가 되어도, 채찍에 맞아도 싼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은 원래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영역에 들어가 살면서 그들이 채찍에 맞고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고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권능을 행하십니다.

 

많은 은사, 권능, 기적, 능력이 임하는 곳이 바로 이 애굽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많은 신자들은 자기의 신앙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은사가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기도의 응답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니까 자기들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속생명파의 책들을 읽고 심취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술람미 여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십자가의 도에 대한 메시지를 조금 접하면 기존의 모든 신앙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은혜를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서 거짓선지자라고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주로 예레미야의 [저희가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6:14,8:11)를 많이 인용합니다.

신앙의 과정, 인생의 과정, 영성의 발달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한 두 가지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이 있고 중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있고 대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있고 사회와 인생의 경험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나중에 성장한 후의 관점에서 보면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은 다 거짓이겠습니까.. 한 때는 사탕이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거짓된 미혹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사탕을 나누어주는 유치원 교사들을 다 치아파괴범으로 여기는 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때가 되고 자라면 무엇이 진정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인지 알게 됩니다.

 

애굽의 핵심 은혜는 보혈의 은혜입니다. 어떠한 권능과 기적으로도, 은사와 능력으로도 바로를 이기고 애굽을 탈출할 수 없으나 마지막 재앙, 피의 사건으로 인하여 그들은 드디어 저주의 땅을 떠나게 됩니다. 그들은 피의 바다를 건너서 그곳을 탈출합니다.

그러나 바로의 군사들은 모두 다 피의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보혈의 역사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에게는 구원의 도구이지만 마귀에게는 멸망의 도구입니다. 그들은 피에 대하여 대항할 아무 힘과 권세가 없습니다.

 

애굽은 은혜의 시기입니다. 이때는 어린 아기와 같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칭얼거릴 뿐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왜 사는지, 하나님이 자기들을 왜 창조하셨는지, 사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주님의 뜻을 추구하며 따라야 하는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합니다. 유명한 대학에 가고 돈을 많이 벌고 편하게 살고 자식들이 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울고 금식하고 하소연하고, 공격을 받으면 분노합니다. 자존심이나 기분을 하나님처럼 여깁니다. 육신의 욕망을 따르며 자기의 고유한 취향이 있고 애정이 있는데, 그것을 버릴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세상입니다. 아직 영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한 세상에 대한 갈망이나 이해도 거의 없습니다. 이들은 아직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있고 환경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강아지가 수학이나 문학에 관심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 하나님은 자신을 어디로 이끄시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사랑받기를 원하고 편하게 살기를 원할 뿐입니다. 이들은 가치관에 있어서 물질관이나 결혼관이나 성공관이나 출세관이나 이성관이나 가정관이나.. 대부분의 가치관에 있어서 세상 사람과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이란 자기의 소원을 채워주는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의 기대를 채워줄 때 이들은 간증도 하고 좋아하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실망시킬 때 원망을 하거나 상처를 받거나 실족을 하곤 합니다.

 

아직 이들은 육체와 자아가 지옥에 속한 것이며 그것들이 처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릅니다. 자신이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고 그 진정한 고향을 위하여 준비되어야 하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들이 애굽을 나오게 되면 가는 곳은 광야입니다. 이들은 아직 가나안땅을 누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동안 몸에 익었던 것들, 애굽의 냄새, 애굽의 삶, 애굽의 의식을 토해야 합니다. 애굽의 요소를 모두 지워야 합니다.

 

몸이 애굽을 나왔다고 해서 마음까지 나온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애굽을 나온 많은 신자들이 가나안을 향하기는 커녕 애굽이 좋았다고, 그 때가 좋았다고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곤 합니다. 

 

이들은 아직 성과 속의 차이를 모릅니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를 모릅니다. 자기 안에서 미움과 시기와 분노가 일어나도 그것이 지옥에서 온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전혀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애굽의 의식, 마비된 의식이 처리되고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훈련의 장소가 광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초기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배우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훈련과 굴복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십자가의 보혈을 경험하지만 애굽에 있는 신자들은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광야에 들어가서 비로소 말씀을 받습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말씀을 배우며 그 의미를 알게 됩니다. 말씀의 중심이 그리스도이며 피이며 그리스도의 피에 새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을 조금씩 배우고 알게 됩니다.

시내산에서 주님은 모세를 통하여 구체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광야는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자세히 쓰자면 이 부분도 한권의 책이 필요하겠지만, 이 광야의 말씀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말씀, 율법의 말씀을 지켜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광야의 말씀, 이 율법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죽이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 모든 자아가 광야에서 다 엎드러지기까지 역사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이란 죽이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어야 내 안에서 예수가 사시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이 죽어야 새 사람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이며 열매의 비결이며 믿음의 비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큐티를 하고, 나름대로 적용을 하고.. 그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의 중심, 말씀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분적으로 좋고, 좋아하고, 그런 말씀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런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의 중심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말씀은 죽이는 것입니다.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말씀의 역할은 몽학선생입니다. 아, 나는 안 되는 구나.. 나는 끝이구나.. 이렇게 절망시키고 낙담을 일으키고 그리스도 아래 엎드러지게 하는 것이 말씀의 역할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릅니다. 거룩하라, 순종하라, 순결하라.. 그 말씀을 듣고 지키려고 하다보니 내가 더럽고 순종은 커녕 욱하는 성질이 있고 못됐고.. 그러한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7장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절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7장의 절망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면 로마서8장의 영광을 맛볼 수 없습니다. 얼어붙은 겨울이 지나고 생명의 봄이 오는 것처럼, 죽음 후에 부활이 있는 것처럼, 로마서7장의 처절한 절망을 충분히 통과한 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를 해방했다]는 환희의 감격이 터지게 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먼저 죄와 사망의 법으로 죽은 이들이 경험하는 것이지 아직 자기의 처절한 사망성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생명 이전에 먼저 죽음이 있습니다. 그 죽음을 일으키는 것이 말씀의 능력이며 광야의 훈련입니다.  

 

광야란 바로 이 로마서 7장이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나는 안 되는 구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는 구나.. 그렇게 절망을 경험시키는 훈련과 연단의 시기입니다. 내 안에는 선한 것이 없구나.. 내 안에는 오직 이기심과 사악한 자아와 사망 뿐이구나. 이것을 처절하게 깨닫고 경험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주님은 여인을 보고 마음에 음란한 상상을 하면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눈이 범죄하면 빼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손이 범죄하면 찍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문자적으로 순종해서 손을 찍어 버리고 눈을 빼버린 분은 안 계시겠지요? 그것은 철저하고 완벽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육체와 자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자아가 해야할 것은 죽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게 되므로 율법의 의를 이루고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승리의 삶의 비결, 열매를 맺는 비결은 오직 육과 자아가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정죄하고 죽이려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폐부까지 완전히 썩어서 문드러진 우리 자신을 보라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니까 너희 힘으로 살지 말고 나를 믿고 나를 부르고 나를 바라보고 나를 의지하라.. 그렇게 인도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아직 자신이 고상한 사람인줄 아는 사람은 아직 말씀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직 자기 자존심이 있고 자기가 괜찮은 사람인줄 아는 사람은 말씀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모르고 자신을 모르니까 자기를 높이고 사소한 일에 상처를 받으며 억울해하면서 삽니다.

 

아직도 자기 속에 가득한 사망을 모르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삽니다. 심지어 자기 신앙이 최고라고 여기며 남들이 한심하다고 판단하면서 삽니다. 그런 이들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고 자기의 의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도 자기 힘으로 노력하고 살려고 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모르면 자꾸 자기가 행하려 하고 노력을 하게 되며 자기 의가 나와서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고 모든 의와 열매와 생명이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게 되면 자기를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흉악한 죄인 쓰레기인 자신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총만을 한 없이 높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기만을 원하며 자신을 치는 이들에게 상처받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이들에게 상처를 받게 됩니다.

 

어떤 신자들은 학벌이나 용모나 환경 등으로 인하여 우월감을 가지거나 열등감을 가지거나 합니다. 세상 사람이 그렇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신자도 그러한 상태라면 그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아직도 영의 세계를 모르고 세상에 매어있고 자아에 매여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그의 학벌이나 용모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무익한 것입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살리는 것은 그 학벌이나 용모나 어떤 조건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의를 행하려고 죄를 끊으려고 아무리 하려고 애를 써도 안 됩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자기 죽음을 경험하고 자기를 주님께 드리고 주님이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살게 될수록 우리는 변화의 열매를 갖게 됩니다.

죄를 이기려고 온갖 애를 썼을 때는 할 수 없었던 것이 우리 안에서 새 역사를 이루시는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게 되고 승리의 풍성한 변화와 열매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란 죽음의 분량만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실제적인 죽음이 이루어지는 곳이 광야입니다. 육이 죽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 죽음이 이루어져서 드디어 가나안의 입성, 정복의 역사와 풍성한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아직 어린 신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애정을 버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천국에 방해가 되는 줄을 전혀 모릅니다. 이들은 혈연에 대한, 자기 혼의 애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육신의 만족과 즐거움을 버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 왜 잘못인지를 모릅니다. 죽은 육체를 따라 살때 죽음이 오며 산 영을 따라 살 때 진정한 삶이 오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왜 요셉이 없어져야 했는지, 베냐민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지, 왜 이삭을 버려야 하는지, 왜 라헬은 빨리 죽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자기 자존심을 세워달라고, 자기 소원과 욕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며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세상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장가들었으니 바쁘고, 소를 샀으니 가봐야 하고 주를 따르겠지만 장사를 한 후에 따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날 때 그는 비로소 꿈의 허망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를 갈망하지 않은 삶, 주를 향하지 않은 내 멋대로의 삶은 곧 죽은 삶이며 허망한 삶이며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삶인 것을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육신적이고 혼적인 것들이 처리되는 장소이며 기간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 하나님의 나라에게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광야의 기간 동안 처리되어 영의 새생명이 일어나도록 자리를 비켜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무 잎의 아름다움과 풍성함들이 다 죽어 떨어지고 주위 환경도 얼어붙은 죽음을 통과한 후에 봄이 되고 새생명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의 과정은 첫 번째 애굽에서의 은혜의 시기, 둘째 광야에서의 훈련과 굴복이 이루어지는 시기, 그리고 세 번째로 가나안에서 신부되신 주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친밀한 교제와 정복전쟁이 이루어지는 시기입니다. 가나안에서는 천국에 가까운 은총을 누리며 신부와 용사, 즉 친밀함과 승리의 열매를 누리게 됩니다.

 

가나안에서는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주님의 깊은 은혜가 부어집니다. 광야의 죽음을 통과할수록, 육신의 욕망과 자아의 욕망, 자존심이 무너질수록 주님에 대한 미칠 것 같은 갈망, 사모함이 일어나게 됩니다. 순결한 삶에 대한, 사랑하는 삶에 대한 욕망이 한 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 많은 밤들을 기도로 보내게 됩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의무가 아니라 기도와 말씀, 주님의 임재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이 없이는 도저히 살 수가 없으며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살고 자기 취향으로 사는 것에 아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며 오직 모든 순간에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의 원하심을 이루고 싶은 갈망이 점점 더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들이 가나안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일들 중의 하나입니다.  

 

자기의 영이 어느 곳에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가치관, 의식, 성향, 지식, 소원.. 등의 모든 것들이 전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식들의 성향과 변화들은 타고난 기질이나 성향이 아니라 훈련과 과정의 이수함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들입니다.

 

은혜의 시기, 훈련의 시기, 성숙한 시기.. 이 과정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생 동안 경험하게 되는 신앙의 여정입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은혜에 대해서 충분히 배우고 경험해야 하며 보혈을 힘입어 애굽을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삶의 훈련을 통해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빨리 깨닫고 굴복하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빨리 광야의 훈련을 통과해서 다음 단계로 가야합니다.

 

주님께서 애굽에서 백성을 부르신 것은 광야의 척박한 삶을 위하여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영광스러운 삶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가나안은 단지 기도의 달콤함과 신비함에 빠져서 취해 있는, 그러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도피하여 자기만의 세계 속에 빠져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해야 할 아름답고 놀라운 상태입니다. 그것은 천국에 합당한 신자가 되는,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초청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나아가야 할 목표이며 천국의 실제를 맛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아직도 애굽에 있습니다. 애굽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역이 아닙니다. 그곳은 마귀가 지배하는 영역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에서 나와야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보호가 없습니다. 그곳은 들어가서는 안 될 영역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애굽의 문화에 빠져 있습니다. 애굽의 백성들이 경배하는 우상의 문화에 같이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에게는 아직 훈련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정화의 단계와 가르침이 오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보혈로 씻김을 받고, 애굽을 나와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아무 훈련도 없습니다. 말씀도 거의 임하지 않습니다. 어둠의 장소에 있을 때 주님은 그곳에서 말씀하시지 않고 먼저 그들을 그곳에서 나오도록 인도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주의 음성을 듣고 예언을 합니다. 은사도, 음성도, 예언도 이 세 가지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각자의 영이 성장한 수준에서 메시지를 받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영역에서는 은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격려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두 번째의 영역에서는 정화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세 번째 영역에서는 주님이 맡기신 사역에 대해서, 그리고 그 친밀감의 정도에 따라서 메시지가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신자는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의 귀한 사람이다] 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이들은 [나는 너의 삶에 **을 원하지 않는다. 너는 그것을 내려놓지 않겠니?] 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들은 좀 더 개별적인 메시지와 사역에 대한 메시지를 받습니다. 이와 같이 음성을 들어도 처음부터 사역적인 것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음성도, 감동도, 메시지도.. 각자의 성숙 단계에 따라 받게 됩니다.

 

나는 한국교회의 많은 신자들에게 은혜의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까.. 애를 씁니다. 혈연적인 애정, 자아적인 애정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들은 아직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기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보혈을 의지하며 보혈로 인하여 죄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 메시지가 충분히 심령 깊은 곳에 가라앉아야 합니다. 표면적인 이해는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잠깐 울고 흥분하는 것은 우리의 깊은 곳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메시지가 우리의 의식 내부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가야 합니다.

 

이들은 충분히 은혜의 메시지를 듣고 그 다음에는 애굽을 나와야 합니다. 자기의 삶 속에 주님이 싫어하시는 영역이 곧 애굽입니다. 거기서 나와야 거룩을 향한 훈련이 시작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애굽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징계가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징계를 받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고 함부로 살아도 징계를 받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시편 73편에서 아삽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순간적으로 낙심하여 한탄합니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시73:3-4)

 

나사로와 같이 언급된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다가 편안한 상태로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잘 먹고 잘 살면서 징계 없이 편안하게 죽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나는 많은 이들에게 은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지만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정화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개인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부분을 지적하고 전달합니다. 그것은 광야의 메시지와 같은 것입니다.

 

멀리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잘 모르는 이들에게 나는 은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나는 정화의 메시지, 광야의 메시지를 잘 전합니다. 받아들이는 이들은 눈물과 회개와 통곡이 이루어지며 이들은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들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과 눈물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뜻을 앙망하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 기쁨인지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화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모임을 이끌어 왔지만, 지속적으로 가까이 기도와 모임을 나누며 교제하는 이들보다는 반성과 회개를 거절하거나 반성의 자세가 부족해서 탈락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적을 받으면 기분 나빠 합니다. 불쾌하게 여기며 따라가기가 버겁다고 말합니다. 

 

죄와 잘못에 대하여 지적받는 것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반성하지 않을 때 나는 그들과 아쉬운 이별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의사의 처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 환자는 다른 의사를 찾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에게 병이 없으며 건강에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의사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주님이 주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를 주님 발 앞에 내려놓지 않으면, 그리고 주님의 지배 가운데 들어가지 않는다면, 모임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사람이 됩니다. 모든 이들이 주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개성이 강한 사람이 모임을 주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의 마음이 불쾌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가 상처를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 속한 모임이 아닙니다. 그러한 곳에서는 주님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다른 이들을 섬기며 배려해야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주님에 대한 간절함과 주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는 전제 안에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섬김과 배려는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자신을 사랑해주고 받아주고 칭찬해주고 모든 것을 용납해주기를 원합니다. 자기 입장을 들어주고 이해해주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첫 번째 단계에서 필요합니다. 하지만, 은혜와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그 첫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 성장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자기 입장을 버리지 않으면 지옥의 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배워야 할 때가 옵니다.

 

자기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쉽게 서운하고 쉽게 상처를 받으며 쉽게 두려워하고 쉽게 낙담합니다. 이들은 자기 입장을 버리고 주님의 입장을 가져야만 천국이 임하고 세상을 초월하고 이길 수 있으며 주님의 통로, 사랑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많이 안타까와 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징계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죄를 잘 지적하지 않습니다.

강대상에서 죄에 대하여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어떠한 행위나 마음의 자세가 주님께 나아가는데에 방해가 되는 지에 대해서 설교를 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하고 효과적인 것은 개인적으로도 죄를 지적하고 그것을 버리고 회개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필요합니다.

 

사역자는 신자들의 영이 성장할 수 있도록 그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너무 어린 신자는 기다려야 하지만 오래된 신자를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역자가 심약해서 세력이 있는 신자의 죄를 지적하지 못합니다. 설교를 하면서 멀리 빙빙 돌려서 이야기를 하고 혹시 상대방이 상처를 받아서 교회를 떠난다고 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합니다. 그것은 바른 사역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사역자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신자가 듣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그 신자를 도울 수 없습니다. 사역자가 자기의 직업을 잃을까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면 그는 얼른 다른 직업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사역자는 신자를 자기 수하로 여기거나 비인격적인 자세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신이 높은 존재여서가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신자를 세우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온유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사랑을 담고 권면을 해야 합니다. 화를 내거나 거칠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신자들의 자아를 죽인다고 신자들에게 모욕적으로 말하는 사역자를 본 적도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자와 자비로 대하셨습니다.  

 

가르침은 주님의 방식과 주님의 영으로 해야 합니다. 거칠은 자세는 영을 세우지 못합니다. 자식에게 예의를 가르치려고 조직폭력배를 통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아름답고 온유하며 사랑과 긍휼이 가득하신 분입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수술은 예리하고 정확하게 사람의 중심을 찌르며 사람의 중심과 그 동기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긍휼과 자비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에는 항상 주님의 인격과 성품이 나타납니다. 주님은 사실 때도 죽으실 때도, 사역하실 때도 가르치실 때도 십자가를 짊어지실 때도 채찍에 맞으실 때도 항상 사랑과 온유함과 거룩함과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속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사역하는 사람은 사나 죽으나 사랑을 고백하거나 꾸짖거나 언제나 동일한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님으로 부터 온 것이 아니면 그것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욱하는 마음으로 꾸짖는 사역자나 부모는 신자나 자녀들을 주님께로 이끌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고백할 때보다 징계할 때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개인적인 기질이나 성향을 따라 어떤 이를 좋아하고 어떤 이를 싫어한다면 그는 주님의 사람이 아니며 주님의 사역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참된 권위가 없습니다.

그러한 사역자는 주님의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기호와 취향을 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는 죄를 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의 징계라면 신자들이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역자의 사람이 됩니다. 사역자의 기분을 맞추고 눈치를 보며 사역자를 높이고 사역자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것은 사역이 아닙니다.

 

사역자는 오직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기에게 잘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람이 되고 주님께 이끌리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을 받아서 온유하고 겸손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죄들을,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하나 하나 지적해야 합니다.

 

만약 신자가 그것을 듣기를 원치 않는다면 사역자는 그에게 더 이상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하는 마음으로 그를 떠나보내고 그가 다른 사역자를 통해서 주님을 알아가도록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광야의 경험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혼이 처리되어야 하는 지를 잘 모릅니다. 모두 각자가 자기 고유한 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대기를 좋아하고 어떤 이들은 소극적입니다. 어떤 이들은 급하고 어떤 이들은 느리며 어떤 이는 치밀하고 어떤 이는 기분파입니다. 어떤 이는 너무 차갑고 어떤 이는 너무  뜨겁습니다.

 

우리의 육성이 처리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의 죄성이 처리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또한 이러한 혼의 기질들도 광야에서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에게 복종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죽음과 굴복이 반복되고 증가되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실제, 천국의 실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이와 같은 성화의 과정, 천로역정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어느 집에 태어나서 어느 유치원에 가고 어느 학교를 나와서 어느 직장에 가고 누구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늙어가고.. 이러한 것이 인생의 과정이 아닙니다.

 

인생이란 주님이 우리를 만지시고 만들어가시는 과정입니다. 타고난 육신적이고 자아적이고 본능적인 사람이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육신적이고 본능적이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알게 되고 그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래서 애굽과 세상적인 것에서 분리되고, 그 다음에 주님의 훈련을 통해서 나의 자아와 욕망을 깨달으며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상의 사소한 삶을 통하여 주님의 메시지와 역사들을 경험하고 서서히 육과 자아의 죽음을 경험해가며 영광스러운 세계를 알아가게 되고 주님의 아름다우심과 친밀함과 사역과 사명을 깨닫고 순종하며 이루어가는 과정.. 이것이 곧 인생의 과정인 것입니다.

 

애굽에서 주님은 보혈을 흘리십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립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와 우리 십자가가 연합하므로 우리는 온전한 죽음을 경험하고 주님의 사람이 되어 새 생명의 신비와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인생은 성화의 과정입니다. 신앙은 성화의 과정입니다. 내가 소멸되고 주님이 내 안에서 충만케되는 과정입니다.

내 속의 지옥이 소멸되고 천국이 내 안에 충만케 되는 과정입니다. 천국은 바깥 환경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훈련을 통과하고 순복될수록 우리 안에는 천국이 임하며 주님의 생명이 가득하여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게 됩니다.  

 

이 믿음의 여정을 걸어갈수록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되어 예전에 알지 못하던 기쁨을 누리고 사랑을 누리고 지각을 누리며 영광의 세계를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성장의 과정에 있습니다. 당신도 그 인도하심의 과정 안에 있습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느 과정에 있는지, 어떤 것을 통과하고 있는지, 주님이 지금 자신에게 무엇을 행하시고 계신지를 기도하고 묻고 분별하여야 합니다.

 

당신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은혜의 메시지를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애굽의 영역에서 나오십시오.

그리고 당신을 징계하시고 권면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십시오.

자존심을 버리고 고집을 버리고 자기 합리화와 자기 연민을 버리고

오직 주의 뜻이 당신 안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순복하십시오.

 

나를 버리고 나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원하심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수록 그것은 영광이고 축복입니다. 지금은 아파도 세월이 흐른 후 당신은 그러한 고통과 굴복과 훈련의 시간들을 기뻐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천국의 사람으로, 주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온전하게.. 오늘도 우리를 이끄시며 훈련하시고 계십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복하기를, 오직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영광스러운 승리자의 자리에 서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오, 주님.. 할렐루야.. 아멘..

 

 

 

출처 : 정원목사 독자 모임
글쓴이 : 정원목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