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는 이유를 완전히 바꾼 실용주의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내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돕느냐 안 돕느냐에서 찾습니다 나님의 존재를 실효성에
따라 파악하려는 심각한 왜곡이 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실용주의 정신은 신앙적인 수단을 사용해 번영을 얻을 수 있다는 번성 신학으로 나아갔습니다. 번성 신학은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과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이나 말로 복을 받는다는 논리의 책들이 베스트셀러인 것도 번성 신학의 영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고 항상 믿음의 말이나 긍정적인 말을 하라.”는 것은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성경 역시 혀를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긍정적인 태도와 말은 신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덕목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과 말이 무엇인가를 이루는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최근의 경향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말이나 태도는 그 자체로 어떤 능력을 행할 만큼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신뢰가 오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외적 결과일 뿐입니다. 결국 말이 아니라, 말을 있게 하는 내면의 상태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번성 신학은 뿌리는 다 잘라 버리고 꽃만 꺾어다 놓고서 기다리면 여기에 열매가 맺힐 거라고 말합니다. 정작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시하고, 긍정적인 생각과 말이 번영과 성공의 열쇠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번성 신학이 조장한 왜곡의 예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신앙을 병이 낫는 수단이나, 복 받는 방편쯤으로 여기는 모든 태도가 번성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번성 신학이 얼마나 교회에 깊이 스며들었는지, 이제는 번성 신학에 물들지 않은 교회를 찾기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어느 교회의 사역 매뉴얼에는, 모든 설교와 심방 시 1회 이상 복에 대해 말하라는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실용주의를 따르지 않으면 목회도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실용주의가 교회에 깊이 들어오면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 믿는 이유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내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돕느냐 안 돕느냐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실효성에 따라 파악하려는 심각한 왜곡이 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풍조가 팽배해진 데는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성공에 대한 간증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 역시 교회에서 성공에 대한 많은 간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간증들의 내용은 천편일률적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하나님을 찾자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면서 상황이 고쳐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에는 그런 과정이 있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간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이 설사 성경에 있다 해도,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간증하는 이들의 간증 속에 담긴 실용주의 정신이 아닙니다. 데이비드 브래이너드처럼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더 하나님을 높이려 하고, 더 하나님을 잘 믿으려 몸부림쳤다는 간증이 말해 주듯이 그런 역사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간증도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간증을 들어보았습니까? 바울처럼 충성하면 충성할수록 고난이 몰려왔지만,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해진다는 것을 믿고, 어려움 속에서 더 간절히 하나님을 붙들었다는 간증을 귀로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책을 통해서는 읽어 본 적이 있어도, 직접 귀로 들어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간증은 많지만, 실용주의 차원에서의 성공담이 대부분인 시대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실용주의에 따른 신앙과 삶을 배웠고, 부지불식간 실용주의를 추구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실용주의적인 해석과 가르침이 우리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간증은 이방 종교에도 다 있습니다. 힌두교와 불교에도,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 심지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이비 종교들에서도 그런 정도의 간증은 다 있습니다.
한 예를 든다면, 황우석 교수의 간증 같은 것입니다.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였던 황우석 교수는 사망률이 70퍼센트에 이르는 어떤 질병에 걸려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바람을 쐬러 친구와 함께 어떤 절에 갔는데, 그 절에서 난생 처음으로 부처상에 절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돌아서 나오는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음이 맑아지며, 새로운 기운이 온몸에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황우석 교수는 만일 자신이 살아난다면, 매달 한 번씩 이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 뒤로 이 간증을 할 때까지 18년 동안 매달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황우석 교수는 그 덕분에 자신이 지금까지 살게 되었다며, 자신의 살아있음이 모두 부처의 은공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처음 절을 할 때의 경험을 일종의 회심으로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황우석 교수는 자신의 결심을 지키고자, 해와 출장 중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불공을 드리러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의 뜻을 따라, 생명공학 치유 기술 개방에 매진하고 있다고 간증했습니다.
황우석 교수에게 작용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질병이 치료되었다는 것입니다. 환산할 수 없는 큰 현금 가치가 있는 실용주의적 변화가 황우석 교수를 종교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간증은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이단들의 간증에서도 넘쳐나는 이야기가 질병의 치료, 이혼 위기에 놓였던 가정의 회복, 망해 가던 사업의 놀라운 성공입니다. 그러므로 효율성 차원에서 신앙을 논한다면, 기독교는 다른 이방 종교나 이단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프로필
•총신대신대원 졸 •영국 에든버러 프리 처치 칼리지와 웨일스 복음주의 신학대학에서 영적 대각성과 청교도 연구 •전, 호주 퍼스 한인장로교회 담임 •현, 하늘영광교회 담임 •저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목마름」「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예수를 믿는다는 것은」「기독교 세상의 함정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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