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시대의 역사적 배경연구 (사회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목 차
Ⅰ. 들어가며
Ⅱ. 정치적 배경과 사회구조
1. 로마제국과 팔레스틴
2. 팔레스틴의 정치적 상황
3. 팔레스틴의 사회구조와 성전체제
1) 사회구조
2) 성전체제
Ⅲ. 사회적 배경
1. 사회적 상황
2. 사회적 집단
1) 사두개파
2) 바리새파
3) 에쎄네파
4) 젤롯당
5) 헤롯당
6) 땅의 백성들
3. 팔레스틴에서의 계급투쟁
Ⅳ.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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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며
복음이 이 땅 위에 선포된지 2,000여년이 지나고 있는 오늘의 역사의 현장속에서 복음의
참 된 의미를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이 복음은 관념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
력이 되고 특정한 정점을 뚫고 인류 전 역사에 걸쳐 작동하는 진리가 되기때문에 구체적인
역사 가 운데 선포되어진다.
이 복음의 의미를 어떻게 하면 잘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지금까지의 모든 신학자와
그리스도인들의 연구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복음의 역사적 배경을 연구함으로써 인류의
역 사를 희망의 역사로 바꾸어낸 십자가의 도인 복음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은 다행스러운 일 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구조와 현실은 주님의 구원사역 즉 복음 선포의 장이요 객관적
인 대상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지상명령을 잘 수행해내기 위해선 이 사회의 물질적 토대와 상
부 구조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인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할 때만이 복음이 필요로하
는 곳 에 역동적으로 선포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우리에게 전제되어야 할 것은
2,000여년 전 이 땅 위에 선포되었던 복음의 의미를 발견하고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
력을 체현함 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 복음의 의미를 어떻게 잘 드러낼 것인가 ? 여러가지 신학적 연구의 과제와 성과들
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복음이 1세기 팔레스틴 사회에 선포되어진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들을 연
구하고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해서 복음이 뿌리내렸던 토양을 잘 인식할 수 있고 주님이 선포
하 신 복음의 의미를 더 깊이있게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대한 의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이라는 시간적 거리는 어려운을
주 고있다. 현대 과학과 역사적 연구의 발전으로 1세기 팔레스틴 사회는 분석되어 왔으나 보
다 객 관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들을 간과한 경우가 많았다. 한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분석하
는가 ? 그것은 그 사회가 처한 역사적 발전 단계속에서 그 사회를 변화.발전시키는 요인들
과 사회 전체 를 규정했던 사회 구조를 밝혀내고 그 위에 세워진 상부 구조들을 분석해낼 때에
비로소 한 사 회는 객관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것이다.
{{녹두편집부 [ 세계철학사 2권 ] (녹두출판사,1985) p 116}}
따라서 본 소고에서는 1세기 팔레스틴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를 분석하고 그 사회 구조가 갖는
모순점과 주요한 사회적 현상들 그리고 사회적 집단들간의 갈 등에 촛점을 맞추어 연구하고자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 당시의 객관적인 상황에 근접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사 회의 구조와 모순 관계 그리고 제 집단간의 투쟁과 갈등만을 다룬 점이 아쉽다. 정치,경제,
사회, 문화,예술등 전반적인 영역을 총체적으로 조망해야만 더욱 더 깊이 있는 연구가 될 것인
데 그 렇지 못한 점이 본 소고의 한계점이며 또한 앞으로의 연구 과제를 제시해준다 하겠다.
그렇지만 한 사회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구조이며 제 집단간의 투쟁이라고
할 때에 이 러한 한계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일정 정도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II. 정치적 배경과 사회적 구조
1. 로마제국과 팔레스틴
기원전 750년경 리메르 강변 일곱 폴리스에서 일어난 로마는 차츰차츰 주변 세계를 정복하
고 여러 해를 걸친 포에니전쟁(B.C 264-146)과 악티움 해전을 통해 동서 지중해의 패권을 잡게
되었고 그로부터 2세기동안 로마제국은 최대의 번영기를 맞이하여 지중해를 중심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B.C 64년경 하스몬 왕가 내부의 권력투쟁 {{B.C 67년경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이 죽자 그녀의
합법적인 아들 히르 칸2세가 법에따라 왕위를 이어 받아야하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 2세가 왕위
를 놓고 그와 쟁탈전을 벌였다.이들은 유대내에서 권력투쟁을 벌이던 중 폼페이우스의 호의를
얻 기위해 애를썼다. 폼페이우스는 군사적 수단을 감행한 아리스토불 2세를몰아내고 예루살렘
을 점 령하였고 히르칸 2세를 왕위에 세웠다. JOSEPHUS,김지찬 역 [ 유대전쟁사 ] (생명
의말씀 사,1990) p 40-49}}을 틈타 팔레스틴을 식민지화한 로마제국은 시리아와 팔레스틴을 상품
시장화 하고 주요한 로마제국의 전략기지로 삼았다. {{KSCF [ 성서와 실천 - 신약편 ] (민중
사,1989) p18}}
로마는 여러 식민지에다가 그 지방 출신의 통치자를 임명하는 고도의 정책을 폈으며 친로마주
의적인 왕권을 지원하여 로마제국의 광활한 영토를 다스려 왔다. 그 후 내부 권력투쟁에서
안 토니우스가 패전함으로써 시리아와 팔레스틴은 로마제국 서부를 통치하던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는데(B.C 31), 이 때에 헤롯1세(B.C 37- B.C 4)는 재빠르게 안토니우스
와의 관 계를 끊고 로마 옥타비아누스의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
{{헤롯 1세는 당시 갈릴리를 유대 지방의 총독이었던 아버지인 안티파테르 로 부터 위임을 받아
통치하고 있었다. B.C 40년에 파르테르 유목민의 침입으로 당시유대를 통치하였던 파자엘과 대
제사당 히르칸이죽자 생존 을 위해 로마로 도망하였으며 거기에서 원로원의 신임을 얻어 유대의
왕으로 임명 되었다. 그 후 B.C 37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위에 오 를 수 있었다.
H.J.GUNNEWEG,문희석 역 [이스라엘 역사](한국신학연구소 1986),p 282}} 그 후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유대 공동체가 사라질 때까지 헤롯1세의 자손들은 팔 레스틴을 통치하였
으며 로마제국은 충실한 종인 헤롯왕가를 통해서나 혹은 직접 통치로써 팔레 스틴을 다스려
왔다. 이러한 정치적 흐름속에서 로마제국의 정치적 상황은 팔레스틴의 정치,경 제,사회,문화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로마는 B.C 1세기 팔레스틴과 시리아를 점령한 후부터 헬라 문명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통 해 헬라주의-로마 문화를 이룩해 나갔다. 아우구스투스 {{B.C 27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으로 부터 로마의 제 1시민으로서의 신의 칭호를 부여 받았다. E.ROHSE [ 신약 성서 배경사
] (대 한기독교서회,1990) p 173}}는 로마의 국경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점령지들은 그가
임명한 총독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헬라의 민족들에게는 자치가 허용되었으며, 팔레스틴 사회
에서는 로 마의 원로원의 성격과 유사한 산헤드린이 있었다. 이 산헤드린은 팔레스틴 사회와
밀접하게 관 련되어 있었으며 그 사회에서규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제 계급들과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은 유대 사회에서 최고의 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로마정권
에 굴복하여 민 족의 질서와 안녕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이해와도 일치하는 로마제
국의 식민통치에 대체로 동조하였다.
{{안병무 [예루살렘성전 체제와 예수의 대결 ](신학사상 58호,1987) p 570}}
아우구스투스는 A.D 14년 76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현명하고도 지혜로운 통치를 했으며
오 랜 평화를 유지시켰다. 그의 양자 티베리우스가 황제에 56세에 오르게 되었고 선황과 같은
독 창적인 능력은 결여되었지만 신중한 정책을 펼쳤다. 엄격함과 의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
들과 교제하지 못했으며 많은 적을 만들었던 {{ 임영천 [ 신약의 인물 배경사 ] (풀빛 목
회,1990) p 37 }} 그는 본디오 빌라도(A.D 26-36)를 유대와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아우구
스투스 황제가 다스리던 전 영토를 질서있게 계속 유지시켜 나갔다. 예수 당시 로마의 황제
가 바로 이 티베리 우스였으며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은 본디오 빌라도였다.
2. 팔레스틴의 정치적 상황
헤롯 1세의 통치는 헬라주의-로마적 기준에 의하면 전에 없는 영광스러운 반면에 특히 유다
농민들에게는 경제적,정치적으로 억압적이었다. 헤롯의 광대한 건축 계획과 낭비는 납세자인 민
중들의 고혈을 모두 짜내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통치 중 B.C 4년에 헤롯 대왕이
죽자 급기야 민중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헤롯이 죽자 민중적인 폭발이 모든 통치 영역에
서 일어났다. {{F.BELO op. cit. p 110}}
이에 로마는 질서를 무자비하게 잡았고 민중들의 반로마적 분노는 커져 갔다.
팔레스틴은 헤롯의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는데 아켈라우스(B.C4-A.D6)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 리고 이두메를 다스렸으며 헤롯 안티파스(B.C4-A.D 39) 는 갈릴리와 동부 요르단에 있는
베뢰 아를, 그리고 필립푸스(B.C 4-A.D 34) 는 북부 요르단 지역을 다스렸다. 이 세 아들은
영토 분 할에 대한 인준을 받기 위해 로마를 각각 다녀왔다.
매우 전제적이었고 포악한 통치를 했던 아켈라우스는 백성들의 미움을 받았으며 억압받던 신
하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그들의 고통을 간절하게 호소했고 그는 받아들여
A.D 6년 아켈라우스를 갈릴리로 추방시켰다. 아켈라우스가 다스리던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
고 이두메는 이때부터 로마 총독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로마총독은 가이사랴에 머물
렀으며 유대인의 축제일에 예루살렘에 올라왔다. 로마는 유대사회의 종교적 공동체의 생활과
산헤드 린의 활동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에 올 때에는 군기를 들고 오지
않았다.
최고의 법적 권력은 총독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산헤드린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방
의 유대 공동체와 관련된 사항만을 처리할 수 있었으며 사형 선고나 집행은 할 수 없었다(요
18:31). 로마군대는 안토니아성에서 주둔하고 있었으며 대축제일이나 정치적인 봉기시에만 증강
되었다. 예수시대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 총독으로 있었는데(눅3:1), 그는 악명 높은 로마
총독으로 공인되었고 잔학성과 포악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A.D 20년 유대 총독으로 부임
할 당시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군기를 예루살렘
성에 가져오게 하여유대인들로 부터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훼손시키느
니보다는 기꺼이 죽음을 감수한다고 저항하자 비로소 군기를 다시 가져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임영천 op. cit. p 132}}
로마제국은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유대 사회의 독특성을 고려하여 매우신중한 태도를 취
해 왔다. 제일먼저 로마가 한 조치는 세제개혁이었다. 이것을 위해 주민들의 수효와 그들의
재산 상태를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눅2:1-5). 2년동안 소출의 4분의 1을 내어야 하는 세
금 징수는 경제적인 빈곤을 초래했으며 하나님이 아닌 로마 황제에 대한 납세는 유대 사회에
있어서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인구 조사는 극도의 반로마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
켰 다. 이 세금 징수는 유대인들의 독립 국가권이 박탈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로
마인 에 대한 혐오감은 커져 갔고 세리들까지도 경멸하게 되었다.
{{H.J.GUNNEWEG op. ct. p 286}}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에서 B.C 4- A.D 39년까지 통치하였다. 그는 자기형 아켈라우스보
다 는 사려깊었지만 로마인에게는 노예처럼 아첨하였으며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포악한 폭군
적인 통치자였다.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 근친상간을 범해했다 책망한는 세례
요한을 목베었던 장본인이었다(마14:1-12). 예수는 이 헤롯 안티파스를 여우라고 불렀으며(눅
13:32) 안 티파스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기적을 보고 싶어 만나고자 하였다. A.D 39년에 안티파
스 역시 로 마의 황제 칼리굴라(A.D 37-41)에게 파면되어 추방당했다.
필립푸스는 로마 황제의 초상화를 새긴 화폐를 주조하게 했던 첫번째 유대인 군주였다.
그 가 다스리던 북부 요르단 지역에는 유대인이 소수였기 때문에 고려할 필요가 없이 초상을
그려 넣었던 것이다. 필립푸스는 A.D 34년 후손없이 죽었다.
3. 팔레스틴의 사회 구조와 성전 체제
1) 사회 구조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는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에 속했다.
{{당시 팔레스틴 사회는 준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서 중요한 특징인 관
개수리제도가없었다. 이 생산양식은 생산단위인 촌 락공동체 위에 잉여생산물을 점유하는 성전
을 중심으로한 국가가 있는 사회 구조를 말한다. K.FUSSEL [ 텍스트 이론, 사회구성체 분석
](신학 사상,1987여름) p 311}}
F.BELO 는 여기에 대해 두 가지 점에서 1세기 팔레스틴 사회 구성체를 묘사하고 있다. 첫
째로, 촌락은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의 특징인 농촌 공동체의 토대였으며 국가-성전은 촌락
의 잉여를 수탈하는 상부 구조라는 것과 둘째로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 사회의 대토
지제와 상업 부분은 최소한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에 속한다고 간주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다.
{{F.BELO [ 예수시대의 민중운동 ] (한국신학연구소,1990) p 5}} 이러한 분석은 타당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역사적 발전 과정을 경제적 관계로 분석 {{여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식되고있는 사회
역사적인 분석방법으로 예수시대의 사회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철학소사전
] (동녘,1990) p 175-176}}해 볼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에 제시된다.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
이 존재 기반이었고 토대였던 촌락 구조는 계속적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노예제 사회였던 로마
의 식민 통치 사회와 어떻게 접목될 수 있었는가 ? 예수시대 팔레스틴(특히유대)은 헤롯 왕
조 에 의한 대리 통치 혹은 로마 총독의 직접 통치의 방식으로 전개되었는데도 여전히 촌락 공
동체 적인 사회 구조는 붕괴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원시적
인 공동 체 사회가 사유 재산제의 도입에 의해 노예제 사회로 발전했음을 상기할 때 우리는 노
예 대 노 예소유주와의 모순 관계가 사회 발전의 주요한 역할을 했던 로마의 사회 구조가 팔레
스틴에 규 정적인 역할을 미쳐 고대 이스라엘 사회 구조였던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을 완전히
뒤흔들었을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팔레스틴 사회는 여전히 국가-촌락의 생산 관
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팔레스틴 사회의 종교적 특수성을 중심으로
유대공동체의 성 격과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의 성격을 살펴볼 때만이 얻을 수 있다.
당시 팔레스틴 사회는 촌락과 도시에서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서 유대 사회 전반
을 지배해 왔던 집단이 존재해 왔다. 하스몬 왕조때부터 성전 체제를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결합된 무리들(사두개인,바리새인등-여기에 대해서는 후술)이 있었는데 이들의 최고 원로 회의
가 산헤 드린
{{산헤드린은 대사제 1명,사두개인(사제) 24명,장로(족장 혹은 지주) 24명, 바리새인(서기관) 24명
도합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었다. 이것은 유대가 로마 총독이 지배하는 속주가 된 A.D
6년 이후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산헤드린의 정치적 힘은 성전 체제를 중
심으로 유대의 모든 지역에 관철되 었으며 그 이데올로기적 힘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미
쳤다.
{{F.BELO op. cit. p 19}}
이 지배 계급의 연합체와도 같은 산헤드린은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존립 근거를 확보하
였으며 이 성전 체제를 통해 팔레스틴 민중들이 생산한 잉여 가치를 성전세를 통해 점유했
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에 충실한 신하로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관철시켰고 산헤드린을
통해 부를 획득했으며 전통적인 유대사회와 유대주의를 유지시켜왔다. 이리하여 여러 민족들
의 자치를 허용한 로마의 식민 통치는 지배 계급의 이해 관계를 보장해 주었고 유대 사회의
지배 자들은 로마의 배려에 별다른 충돌 없이 복종했던 것이다.
둘째로 로마의 식민지적 체제에 의해서 엄격하게 유대 사회의 기구는 통제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관할했다. 갈릴리는 헤롯 안티
파스 분봉왕 {{마 14:1-12,눅23:6-12}}이 통치했으며 시리아의 지방 총독에 속해 있었다. 로마
제국은 유대 사회 내에 있는 지배 집단인 산헤드린을 통해서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을, 그리
고 헤롯 안티파스를 통해서 갈릴리 지방을 효과적으로 수탈해 내었고 표면적으로는 유대 사
회의 종교적인 권위와 정치적인 자치 권력을 허용했으나 자기들의 이해에 어긋날 경우에는 폭
압적인 통치를 해왔다. 팔레스틴 민중들은 로마의 식민 지배와 유대 사회 지배 계급들의 착취
와 억압으 로인해 이중적인 고통을 신음했고 극도의 빈곤에 휩싸였다. {{ Ibid p 43}} 이러한
로마 제국주의와 지배 계급의 이중 수탈은 지배 집단에 대한 봉기와 반로마적인 투쟁 을 가져
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예수 시대의 팔레스틴 사회는 로마 제국주의에 편입된 준아시아적 생산 양
식을 물질적 토대로 하고 있으며 이 토대 위에서 유대 사회의 통치 기구인 산헤드린이 존재했
었고 그 종교적, 정치적 특수한 구조는 로마 식민 통치에 예속되어 있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
지 고 있었다. {{KSCF op. cit. p 218}}
이러한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통치와 유대 지배 계급의 통치라는 이중적인 사회 구조의 효
과적인 결합은 성전 체제를 중심으로 이해 관계가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준아시아적 생산 양
식이라는 토대 위에 로마의 식민 통치가 훌륭하게 접목될 수 있었으며 유대 사회의 촌락 공동
체가 노예제 사회로 급변하지 않고 존속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성전 체제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 사회의 전통적인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이라는 토
대에 기초하여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지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해온 지배 계급들의 이해 관계와
노예제적 생산 양식에 기초하여 전 세계적인 지배를 확대해 나가던 로마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
정책의 결합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곳이 바로 이 성전이었다. 로마 제국은 유대 사회의 특수성
을 고려하여 유대인의 군주인 헤롯 왕가나 로마 총독의 신중한 통치를 통해 다스려 나갔으며
성전 을 중심으로한 유대 사회의 정치와 문화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산헤드린을 중심으로한 유대의 성전 체제는 로마와의 야합을 통해 그 존
재의 기반을 다졌다. 예수 시대에는 로마 총독에 의해서 대사제직이 임명되었으며 대사제
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사제복은 총독이 보관하였고 필요할 때마다 총독의 허락하에 꺼내
쓸 수 있었다.
{{임영천 op. cit. p 130}}
성전은 팔레스틴을 점령한 로마 제국주의 세력과 그 동맹 세력의 충실한 시녀가 되었다.
심지어 매일 두 번씩 드리는 희생제 때마다 카이사르를 위한 한 쌍의 짐승을 바쳤던 것이 그
예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KSCF op. cit. p 222}}
경제적인 측면에서 성전 체제는 팔레스틴 민중들의 잉여 가치를 성전세 명목으로 수탈해 내
어 부를 축적해왔던 착취 구조였다.예루살렘 성전이야말로 유대 사회의 하나의 구심점이었으
며 돈이 집중되는 은행의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성전의 수입원인 성전세는 팔레스틴 사회내
의 유 대인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로부터 쇄도하여 엄청난 부를 제공
했으며 그로 인해 지배 계급은 부를 독점하게 되었다.
또한 1년에 세 차례에 있는 대축제일을 맞아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전세계의 유대인들은 자신
의 돈을 유대 화폐인 세겔 단위
{{유대 동전 세겔은 성전에 십일조를 바치는 데 사용되었고 로마 동전 데 나리온은 로마에 세
금을 납부할 때 그리고 그리스-페니키아 동전 드라크 마,미나는 상업에서 사용되었다.}}
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성전에 있는 환전상들은 환전시에 얼마간의 프리
미 엄을 붙였다고한다.
{{안병무 op. cit p 519 }}
이 돈들은 성전 환전상과 지배 계급들에게 분배되어졌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들은 제의
용 가축들을 구입해야 했으며 제2의 십일조 규정을 지키기위해 토지 소산의 십분의 일에 해당
하는 제2의 십일조를 예루살렘에서 소비해야 했다. 요세푸스의 보도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
이 A.D 70년 티투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을 당시에 예루살렘 특히 성전에 얼마나 금이 많았
던지 함락 이후에 시리아의 모든 지방의 금의 가치는 이전의 절반으로 평가절하되었다고 한다.
{{JOSEPHUS op. cit. p 588 }}
이처럼 전세계 유대인들의 방문과 성전세의 징수로인해 엄청난 재화가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 축
적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헤드린을 중심으로한 지배 계급은 성전에 축적되는 부를 독점하고 권력을 유지시키기위해
로마의 식민 통치에 굴복하였으며 성전 체제를 통해 정치,경제,사회,문화등 사회 전반에 걸쳐
서 자신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관철시켜 나갔던 것이다.
III. 사회적 배경
1. 사회적 상황
1세기 팔레스틴의 전체 인구는 150만명 내지 20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B.M.METZGER [ 신약성서개론 ] (대한기독교출판사,1992) p 36}} 이중에 50만에서 60만명이
유대인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팔레스틴 남부 지역인 유대 지방에 서 살고 있었다.북부 갈릴리
지역에는 비유대인이 많이 있었으며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불려졌 다. 유대 지방은 땅이 건조
하고 농업에 적절하지 않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해서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했다.
J.JEREMIAS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수공업이 발전하기에는 원료가 부족했으며 상업
과 교역이 발전하기에도 그 위치가 나빴지만 수공업과 상업은 번창하였고 각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1년에 세 차례에 걸친 전세계 유대인의 왕래와 관 련되어 있었다.
팔레스틴지역의 전통적인 정치적,종교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하나님을 예
배하는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J.JEREMIAS [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 (한국신학연구소,1990) p 119}}
반면에 갈릴리 지방은 땅이 비옥하였고 농업이 발달하였으며 많은 농민들이 있었다. 이
들 의 대부분은 소작인이 아니면 일삯 품꾼들이었다. 헤롯 왕가의 폭압적인 통치와 로마 제국
의 착 취는 당시 팔레스틴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었다. 로마가 유다 지방에 책정한 농지 증세
액이 600 달란트였으며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 헤롯 1세의 수입은 1,000 달란트를 초과했다 {{ 안
병무 [ 사 회학적 성서해석 ] (한국신학연구소,1990) p 222}}는 것은 민중들이 이중적인 수탈을
통해서 대부 분 절대적인 빈곤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의 근거가 된다. 당시 1달란트는 1만
데나리온이었으 며 1 데나리온은 한가족의 하루 생활비였다. 팔레스틴은 과중한 조세 부담과
극심한 기근으로 심한 빈곤으로 고통을 겪었다. 특히 조세 징수의 무자비하고 약탈적이며
전면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가장 비옥한 지역에서도 거의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F.BELO op. cit. p 46}}
도시 역시 마찬가지로 낮은 임금과 많은 실업의 상태가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을 노예로 사
용할 수도 있는 상태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조건속에서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
과 빈곤을 못이겨 촌락을 배회하는 도적떼 집단에 참여하였으며 팔레스틴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 도적 떼는 A.D 60-70년대에 비로소 가시화되는 젤롯당의 배경이 되는 무리
였던 것이 다. {{Ibid p 47}}
민중들은 착취로인한 고통과 기근 때문에 반사회적으로 변해 갔으며 지배체제에 항거하면서
반로마 민족해방 혁명의 의지를 높여 나갔다. 예수 시대에 나타나는 지배 계급과 하층 계
급 간의 갈등과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적 통치와 수탈에 대항하는 반로마적 운동은 1세기 팔
레스틴 사회 현상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내용이었다. 이러한 사회 상황은 당연히 광범위한
대중적 용 기를 유도할 수 밖에 없으며 모든 통치 영역에서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헤롯 1세의 죽음을 이은 민중 봉기 {{Ibid p 110}}와 A.D 66-70년 반로마 항쟁은 1세기 팔
레스틴의 사회,역 사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관건이 되는 사건들이다.
2. 사회적 집단
예수 시대에는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쎄네파, 젤롯당, 헤롯당등 다양한 집단들이 존재하였다.
유대 사회 집단중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쎄네파는 마카베오 하스몬 시대에 생겨 났으며
{{E.ROHSE op. cit. p 22-26}} 젤롯당 계열은 훨씬 후대에 이르러서야 확인될 수 있
다.
{{F.BELO op. cit. p 175}}
1) 사두개파
'사두개'라는 말은 '사독'이라는 이름에서 왔는데 사독은 다윗 왕조 시대에 대사제으로 있었고
그 후로부터 마카베어 시대의 정치적 혼란 때까지 그의 자손들이 계속 대사제직을 지냈던 사
독 계열의 사제 집단을 말한다. 예수 당시에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정치와 종교에 있어서
폭 넓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로마 식민 통치와 헤롯의 통치에 결탁하여 산헤드린을 바리새
파와 함께 장악하고 있었으며 성전 체제의 기득권을 누리던 집단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 해 타락한 성전에 안주하면서 로마의 지배를 지지하였고 대부분이 고위직에 있었
다. 사두개인 들은 예루살렘에 본거지를 이루었고 도시인들을 대표하였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
이 부유한 대지 주들이었다. 그러나 높은 지위와 정치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 다. 사두개파는 율법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바리새파와는 달랐다. 가장 근
본적인 차이점은 바 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확대하는데 사용하였던 구전을 인정
하지 않은 점이었다.
이 사두개파는 산헤드린의 수뇌부를 형성하였다. 대사제들 {{대사제는 원래 한 명이었지만 임
기중인 대사제와 임기를 마친 대사제를 함께 지칭하는 용어였다. }}
은 사두개파의 우두머리였으며 유대 사회와 산헤드린을 대표하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예
수 당시에는 복음서에서도 확인될 수 있듯이 안나스 가문이 대사제직을 맡았다.
2) 바리새파
마카베어 봉기를 일으켰던 율법의 신실한 유대인 무리들 가운데서 바리새인의 공동 사회가
생겨났다. 이들은 율법에 충실하였으며 정치적인 목표는 안중에도 없었다. 전쟁을 통해 올바른
종교적 전통과 율법을 따르고 생활이 안정되었을 때에 그들은 정치적 권력 다툼을 일삼던 하
스몬 왕조로부터 분리되어 경건한 생활,기도,금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실 미래의 전환을
준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정치적인 혁명으로 메시야의 시대를 강제로 만들려는 집
단에 대해서는 거부했다. 바리새파의 대부분이 율법학자 또는 서기관 {{서기관은 특별교육을
받고 공 인된 실무 경험을 쌓은 후 율법의 옛 규정 들을 그 시대에 맞게 해석하는 하나의 전문직
이었다.}} 들이었으며 율법해석자들을 훈련시켜 의식법과 종교법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민사,형사 사건에 대한 판결 {{당시의 사형의 선고나 집행권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다.}}을 내릴
수 있는 서 기관으로 양성하는 학교를 설립하여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이들은
점차 율법에 대한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사두개파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었으며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어 그 결과 하스몬 왕조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때에는 정치권에 편
입하게 되었다.
바리새파는 종교 지배자들의 사회 윤리를 전국적으로 파급하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전국적으
로 만들어진 회당을 통해 각각의 촌락에 존재하면서 강력히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다.
정 치적으로는 로마 제국과 지배 집단의 편에 서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민중들의 생활속에서 종
교적 외피를 쓰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관철시켰다. 이 바리새파는 다시 두 계층으로 나누
어지는데 지방에 대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들인 샴마이파와 상업을 경영하는 도시 중간 계층
인 힐렐파였 다. 이들 두 계층의 경제적인 이해 관계의 차이로 인해 정치적인 입장이 대립되
었다. 샴마이파 는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의 틀에 위기를 가져오는 로마의 노예제적 생산 양식에
기초한 사회 구 조 아래 팔레스틴이 재편되는 데 심한 반발을 갖게 되었고, 힐렐파는 팔레스틴
사회가 로마 사 회 구조하에 재편성되는 것에 상당한 호의를 보였다. 이들의 차이가 로마에
대한 입장의 차이 를 가져오게 되었다. 샴마이파는 자기들의 이익이 침범되는 데 반발하여
반로마적인 입장을 취 하였으며 극단적인 민족 주의를 내세우면서 젤롯당 운동과 보조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에 반 해 힐렐파는 로마에 대해 친로마적인 성격을 띠었다.
바리새파는 정결 규정과 십일조 계명을 아주 엄격히 지켰으며 금식과 기도에 열정적이었
다. 이들의 직업은 사제,평민,수공업자,농부,상인등 다양했으며 도시뿐 아니라 촌락,유대와 갈릴
리에서 살았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6000명 이상이 이 회원이었다고 한다.
{{ B.M.METZGER op. cit. p 37}}
당시 팔레스틴에서 이들은 결코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 영향력은 주
로 율법학자들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구별하여 공동체 생활을 했으며 율
법을 알 지 못하는 민중들을 경멸하였고 예수의 복음이 민중들 속에서 확산되어 나가자 그들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사두개파와 함께 예수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았
다. 이 후 반로마 항쟁 시기에는 많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항쟁에 가담했으며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는 유대사회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게 되었다.
3) 에세네파
에세네파는 B.C 152년 비사독 계열의 요나단이 대사제로 집권하게 됨에 따라 거기에 반발
하 고 나선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상류층 사람들이었고 지식인들이었지만 기존 권력의 구조에
서 밀 려난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예루살렘 성전에 거점을 둔 사제 집단에
대항해 서 이스라엘 종교의 전통과 순수성을 지키려고 한 반예루살렘 사제 집단이었다.
{{BO.REIKE [ 신약성서시대사 ] (한국신학연구소,1989) p 184}}
이들의 묵시적 사상은 민중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종교와 정치
에 대해서는 바리새파와 상당 부분 동일하였지만 그들은 탈국가 탈사회를 지향했다. 바리
새파보 다도 더 율법에 엄격히 복종함으로써 자신들을 구별했고 독신생활을 하였다. 이들에
게 있어서 절대적인 계명은 전체 공동체와 그 회원들의 의식적인 정결을 지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결혼 이 유대교에서는 낯선것이라고 하는 금욕적인 생각때문에 부정하지 않기위해서
여자와의 관계 를 피하였다.
{{E.LOHSE op. cit. p 72}}
에쎄네파의 공동체는 사해 바닷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들의 관심과 목표는 성전의 회복이었다. 이방인들과 지배 집단에 의해서 짓밟힌 성전을
되 찾고자 하는 열망이 그들을 반로마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탈 환하여 로마 제국의 앞잡이로서 성전을 중심으로 온갖 부패를 자행하고 수탈하던 지배 계
층을 숙청하고 자신들의 새로운 성전 체제를 세우려고 율법을 끝까지 지키면서 반로마 항쟁에
참여했 던 것이다. 전쟁의 고통과 공포 그리고 죽음으로 에쎄네파 공동체는 몰락하고 말았다.
4) 젤롯당
예수 시대에는 젤롯당이라고 확인할 수 있는 연합체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 F.BELO op. cit. p 97}}
그러나 젤롯당의 맹아적 형태들은 A.D 6년 갈릴리 사람 유다와 바리새인 사람 사독에 의
해 시작된 반로마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켈라우스가 해임되고 로마의 직접 통치가 세금
징수 를 위해 인구 조사를 요구하게 되었을 때에 이러한 조치는 여러 유대인 집단들을 격분시
켰으며 그들로 하여금 저항 운동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특히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으로써
그들의 반 감을 표시하기를 거부하는 바리새파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이 여기에 속해 있
었다. 이들 은 이 후에 하나의 정파로 조직되고 연합된 젤롯당의 기원이 되었으며 A.D 66년
반로마 항쟁 의 시작과 예루살렘 멸망 때까지 유대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선동하였다고
본다.
{{Ibid p 173}}
이들은 로마 황제의 지배에 대항하여 하나님과 율법과 땅에 대한 비타협적인 신앙으로 성전과
이스라엘을 지키기위해 용감하게 투쟁하였으며 로마 황제 숭배를 필사적으로 거부하였다. 당
시 지배자들은 이들을 강도떼라고 불렀으나 실제의 의미로는 반사회적 강도, 원시적인 반란
의 무 리였다. 1세기 팔레스틴 민중들은 율법에 대한 정열을 가지고 민중 봉기를 선동하고
일으키는 이들을 많이 따랐다. 이들은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란히 인간
의 통치 세력 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단호히 거부하고 나섰으며 성전의 회복을 그들의 투
쟁 목표로 삼 았다. 또한 이 운동은 지배 계급에 대항한 기득권 회복 운동이기도 했다. 반로
마 세력을 이끌 었던 지도자들은 율법의정신을 계승하여 로마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성전을 회
복하려는 무력 혁 명을 추구하였다.
5) 헤롯당
헤롯 당원들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B.M.METZGER op. cit. p 42}}
그들은 헤롯 안티파스 정부의 관리와 그 일파였다.
헤롯대왕의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중의 하나인 헤롯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
역을 다스리고 분봉왕이 된다. 이 헤롯 안티파스는 그의 아버지처럼 헬라주의자로서 로마
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갈릴리지역의 수도를 로마의 석조 건축 기술로 건설한 후에 로마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스라고 명명했다. 그 외에도 여러 도시들을 로마식
으로 건 설하고 로마 황족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이런 식의 조치들은 민중은 물론이거니와
상,중류 계급의 바리새인들마저도 몹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결국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헤롯
정권에 강 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적은 수였던 것이다.
이들은 어떤 종파도 정치단체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Ibid p 43}}
이 용어는 어떤 태도나 입장을 의미하고 있으며 또한 헤롯 왕가의 통치를 지지하고 따라서 자
연히 헤롯 왕조를 지탱케하는 권위를 지녔던 로마인들의 통치를 지지하던 영향력있고 고위직에
있던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있다. 전통적으로 바리새파의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헤롯과 그의
당 원들은 예수를 고발하고 죽이는 일에 있어서는 바리새파와 철저히 결탁하였다(막3:6). 헤롯
일가 와 그의 당은 갈릴리의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중앙 권력과 함께 갈릴리의 양대 지배세
력이었 다.
6) 땅의 백성들
팔레스틴 유대인의 90% 이상은 '땅의 백성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땅의 백성들 (AM
HA-ARES, 암하렛츠)'이라는 용어는 통치자들 및 귀족들과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민중들을 의미
했다. {{ Ibid p 43}}
신약 시대에 와서는 특별히 무지 혹은 무관심으로 인해 모세의 율법과 이에서 파생한 정결
규정들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요 7:49에서 '이 무리'라는 지칭은 다분히
이 러한 의미로 쓰여진 경멸적 인 용어였다.}}
주로 땅의 백성들은 갈릴리에서 살았는데 순수 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유대인들로부터 부도
덕하고 비종교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서 철저히 소외된 민중
들 이었으며 식민 통치자와 지배 세력의 이중적 사회 구조아래 가장 고통을 당하였던 계급들
이었 다. 이러한 억압받는 상황은 민중들의 봉기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이 땅의 백성들은 반로
마운동 의 기본 동력이 되었다.
3. 팔레스틴에서의 계급 투쟁
예수 시대의 팔레스틴은 주목할만큼 천연 자원을 가지고 있고 경제적으로 자급할 수 있었
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모든 농촌과 도시 지역의 민중들은 팔레스틴과 제국의 경제를 연결시
키고자 하는 시도와 점증하는 과중한 조세 부담때문에 심한 빈곤으로 고통을 겪었다. 조세
의 방법은 무자비했고 약탈도 전면적이었으며 일반 민중들에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것이
었다.
민중들은 도시와 촌락으로부터 도망쳐 산적 집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개인적 이익을
위 해서 뿐만 아니라 전체 백성을 돕기위해 무장을 했으며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 는 것을 보았다. 가장 비옥하고 인구가 많은 갈릴리의 구릉 지역은 적절한 그들의 은신처
였다.
거기에서 계급 투쟁이 발생했으며 계속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불만을 갖고 뛰쳐나와 사회적
집 단을 이룬 민중들은 묵시 문학적인 종말론적 대망을 수용하여 계급 투쟁의 사상적인 동력으로
삼 았다.
{{ F.BELO는 여기에 대해서 종말론적인 대망을 특징짓는 유토피아적 지평 을 복음서에서 찾는
다.
첫째, 만족(굶주린 자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눅6:21) 둘째, 토지와 땅의 소유(그들은 땅을 차지
할 것이다.마5:4) 셋째,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고대 관념의 소멸(하나님을 볼 것이다.마 5:8)
F.BELO op. cit. p 49}}
갈릴리를 중심으로 했던 지배 계급에 대한 투쟁들은 A.D 68년 반로마 항쟁을 통해 첨예화
되 었다. 민중들은 팔레스틴 사회가 이중적인 모순 구조를 갖고 있음을 바로 보고 반로마 항쟁
이라 고 전략을 수립했다. 실제로 로마 식민 통치로부터의 민족해방 혁명을 추구했으나 그
들의 진 정한 목표는 순수한 준아시아적 생산 양식으로의 회복을 추구하는 계급투쟁이었다.
이것는 A.D 66년 반로마 항쟁 당시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거기에 있던 채무에 관한 법적
소송 문서 를 불태웠던 것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 Ibid p 51}}
결론적으로 당시의 계급 투쟁은 후에 젤롯당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회적 집단들을 중심으로
한 억압받던 민중들과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자들및 유대 사회의 지배 계급간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팔레스틴사회를 변화.발전시키는 가장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IV. 나오며
우리는 앞에서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A.D 1세기 당시의 팔레스틴 사회의 구조와 사
회 적 집단들 그리고 사회적 가장 주요한 현상들을 살펴 보았다. 한 사회를 분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서는 본 연구의 시대적인 제약성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적인 접근과 분석이 필수적으로
요구된 다는 것을 전제로하는한 팔레스틴의 사회구조와 계급투쟁에 기초한 사회현상에 대한
연구는예 수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라는 것을 우리
는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 당시의 팔레스틴 사회가 근본적으로 갖고 있었던 이중적인 모순구조는 확실히 정치,
경 제,문화,예술등 사회 전반에 걸쳐서 규정적으로 작용했다. 즉, 노예제적 생산양식을 토대로
하고 전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의 팔레스틴에 대한 식민 지배 통치와 로마제국의 충실한 하
수인인 대리통치자들의 지배구조는 사회 전반에 걸쳐서 근본적으로 작용하여 헬라-로마화의
길을 걷게 했으며 민중들을 착취하고 압제하였으며 또한 준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기초로한
전통적인 유대 사회는 성전체제를 중심으로 소수의 지배계급들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다. 이러
한 이중적인 사회 구조는 팔레스틴의 민중들을 극심한 가난의 고통과 억압 아래 신음하게 했
으며 민중들을 통치 자들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길로 나서도록 하였다.
사회적 현상으로는 로마제국과 유대의 지배계급들의 폭압적인 통치와 착취에 대항하는 도탄
에 빠진 민중들의 저항과 투쟁이 당시 팔레스틴에 있었던 1세기 팔레스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이었다.
이상과 같이 본 소고를 통해서 살펴본 예수시대의 팔레스틴사회에 대한 역사적인 조명 즉,
사 회구조와 사회현상에 대한 통찰은 주님의 복음 선포의 의미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과
제를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 주님은 이중적인 사회의 모순 구조 아래에서 억압받고 있었던 민
중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몸소 삶을 통해서 실현시키셨던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복음의 배 경들에 대한 연구를 기초로하여 오늘의 사회구조와 현상들을 분석해내고 우리의 삶
의 과제들을 하나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주님의 복음은 더욱 더 역사
적인 현장 속에 서 살아서 역동하는 능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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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USSEL [ 텍스트 이론, 사회구성체 분석 ](신학사상,1987여름) F.BELO [ 예수시대의 민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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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METZGER [ 신약성서개론 ] (대한기독교출판사,1992) J.JEREMIAS [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 (한국신학연구소,1990) 안병무 [ 사회학적 성서해석 ] (한국신학연구소,1990) BO.REIKE [ 신약
성서시대사 ] (한국신학연구소,1989) H.W.HOUSE,박용성 역 [차트신약,연대표및 배경사](기독교문
서선교회,1992) G.PIXLEY,정호진 역 [ 하나님 나라 ](한국신학연구소,1989) A.TROCME [ 예수
와 비폭력 혁명 ] (한국신학연구소,1986)
[출처] 예수시대의 역사적 배경연구 (사회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작성자 kai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