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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육적인 성도의 특징들

힘찬 발걸음 2010. 3. 22. 13:57

육적인 성도의 특징들

글/扈一麥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교회를 위한 열심은 특심한데, 가끔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착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문제만 생기면 두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사람을 보고 육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은 무엇으로 구분할까요?  교회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 영과 육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하면 ‘교회 와서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영적이고, 세상 속에 나가서 사는 것은 모든것이 육적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은 이문제를 진단하여서 육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것을 취하시길 부탁드립니다.

  

 하루밖에 살 수 없는 하루살이에게 내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내일이 있다고 이해시키고 믿어라 해도 하루살이가 내일을 이해하고 ,믿고, 그래서 내일을 준비하고 살아갈 확률은 0%일 것입이다. 요즈음 인간들의 삶을 보노라면 절로 하루살이가 생각이 납니다. 마치 이땅의 삶이 전부인양 오늘 하루를 위하여서 전력 투구를 합니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고, 절대로 손해 안 보려고 합니다. 이런사람들은 내세가 있는지,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지 의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것을 더욱 많이 움켜쥐려 하고 더 많이 얻으려 합니다. 이유는 '이생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내세를 위하여서 넉넉한 마음과 배려하는 마음과, 이해하는 마음과 때로는 손해도 좀보고 나누며, 양보도 좀하고,베풀며 살라고 하는 말을 이해시키거나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도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의 오늘을 건드렸다가는 큰일이 납니다.

 

 누구라도 자기의 영역을 침범하면 공격하는 맹수처럼 돌변합니다. 그래서 돈(재산)때문에 부모를 해치기도하고 형제지간에 법정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타인이랴...이렇게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루살이 인생을 사는 것은 어느정도 이해가 갑니다. 왜 그럴까? 그들에게는 영생과 영원한 세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하루살이 삶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나와도 영혼을 모르면 육의 삶으로 충만하여 요동치 않습니다. 육적의 삶이란 내세를 관념적으로 믿고 현세에 안주하여 세상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말해서 교회는 다니되 주님의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도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분쟁이 생기면 도무지 용서가 없고 자기의 권리만 주장합니다. 세상법정에 고발하고 양보가 없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니 자기를 낮출줄도 모르고 싸움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지면 끝장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내세나 천국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팍팍하고 옹졸하게, 유치하고 아옹다옹하며 살 수가 없을 것 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르면 "여기가 (세상과 현실이 )좋사오니 .."이다. 그래서 필요 이상의 욕심을 부리고 걱정하고 염려하며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영과 내세에 대하여 아무리 가르치고 이해시키고 설명을 해도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세계를 모르니 모든 것이 자기 생각이 옳고 영적으로 하는것이 이해가 되지를 않는 사람이며, 영적인 것은 교육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체험의 세계입니다. 영적인 사람과 육적의 사람의 특징은 은사의 유무가 아닙니다. 열심의 유무도 아닙니다. 직분의 유무도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의 기준은 변화와 거듭남의 여부와 삶의 최종 목적에 관한 문제입니다.

 

 1. 자연인

 자연적인 사람은 영적 인식이 없기 기본적으로 동물이 추구하는 바와 같습니다. 자연인의 삶의 특징을 간단하게 3가지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삽니다. 2) 자기 중심적 흐릿한 양심을 표준으로 삽니다. 3) 환경에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위와 같은 자연인을 만나면 우리는 믿는 사람들로서 꼭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더 소중한 훨씬 큰 것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좋고 큰 세계가 존재합니다." 바울은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또 다른 증거에 대하여,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기와 분쟁의 죄는 육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뚜렷한 증거입니다."나는 그리스도에 속한 자" 라고 말하면서 육적인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시기와 질투와 분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변호하는 말이 아무리 달콤하게 들릴지라도 분파적인 자랑은 갓난아이의 재잘거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양보하는 사랑이 부족하고 육신을 따라 행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진리를 위해 싸우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위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2. 영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올챙이가 변해서 마침내 개구리가 된 것이 아니라, 개구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왕자로 변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성격이 좋은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죽을 때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지만 천국은 구원의 부산물일 뿐입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죽은 영혼 속에 주님의 생명이 자리해서 새로운 생명이 된 것으로 보는 것이 구원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의입니다.

 

 3. 육신적인 사람

 자연인과 육신적인 사람은 같아 보이지만 다릅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구원받고 한 때 영적인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육신적인 사람이 된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분들은 이상하게 혼합된 형태를 가진 부자연적인 사람입니다. 즉 구원은 받아서 자연인은 아닌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너무 흡사하게 생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육신적인 사람에게는 3가지 뚜렷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케이스는 혼이 육에 속해있는 사람입니다.

 

 1) 기형적인 모습

 그들은 성장하지 않은 '어른 아이'와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몸은 어른인데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어린아이인 기형적인 모습이 육신적인 사람에게 있는 모습입니다. 몸은 어른인데 생각은 유치원생처럼 자립심도 없고 어린 아이처럼 보채고 오직 자기의 소유와 자기 생각을 앞세우고  먹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서 맛있는 음식점과 먹은 것만 자기것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옷,장신구등 최고의 것으로 구입하여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2) 의존적인 모습

 이 사람들은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도 젖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2) 젖은 소화가 잘 되도록 준비된 음식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목사가 주일마다 젖병으로 그들을 먹여 주기를 원하며 교회당에서 나가 길을 가는 도중에 트림을 합니다. 그들은 소화력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지옥은 뜨겁고 천국은 행복하며 예수님은 구원하신다"는 것 이상의 진리를 아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구원의 진리가 너무나 놀라운 진리이지만 그 진리 이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누려야 할 진리들이 많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이 온갖 재료가 곁들여진 맛있는 영적 스테이크를 먹고 있는 동안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젖과 유아용 음식물 정도밖에 먹지 못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것을 먹여 줄 사람까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그분들 뒷바라지하려면 시간을 상당히 소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3) 분열하는 모습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고전 3:3)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못된 선머슴처럼 종종 분열과 논쟁의 중심에 섭니다. 사실상 어린아이들은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도 어른 아이들은 실제로 중요한 믿음의 문제들에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소한 문제, 즉 오르간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하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고집을 절대 굽히지 않습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좁은 세계관으로 편가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크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러한 사실을 기본으로 깔고 창조적인 의견을 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영적인 신앙에서 육신적인 신앙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인 신앙에서 영적인 신앙으로 전진하는 신앙이 되기를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육신에 속했다는 것은 곧 그 역시 보통 사람과 같이 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육적인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을 믿어 온 햇수에 따라 신령해지는 것이 정상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계속 보통사람과 같이 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어린 아이같은 사람들이 교회안에는 많이 있어서 교회가 잠잠할 날이 없고 그것을 보고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서 타종교를 택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연자맷돌을 목에 매여 물속에 던지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보통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고 자주 죄를 범한다면 그는 육신에 속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아무리 신령한 가르침을 많이 알고 있고, 아무리 많은 영적 경험을 했다고 주장한다 해도 또 아무리 칭찬받을 만한 봉사를 많이 했다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독특한 성격과 기질, 이기심, 분쟁심, 허영심, 질투심,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다면 이런 것들이 그를 조금도 덜 육신적으로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육신에 속했다" 또는 육신적이라는 말은 "보통 사람처럼"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행동이 보통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른지 그렇지 않은지를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세상적인 행동이나 습관들이 아직 그대로 생활에 배어 있다면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육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령한 사람으로 분류되든, 육적인 사람으로 분류되든 간에 그것을 가지고 논쟁하는 일은 피하기로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다면,"신령하다"고 지칭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결국 생명에 관한 문제이지, 명칭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 삶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
갈라디아서 5장 말씀은 영과 육의 삶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6~26절에서 육적인 삶과 영적인 삶을 대비시켜 보면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육적인 삶의 열매들은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육적인 삶의 결과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야 의미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삶의 특징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미래상입니다. 가장 성숙한 인간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삶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열매들이 있어야 합니다. 방언, 예언, 신유 은사 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 될 게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지 않을 때 그것은 병든 것입니다.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병든 것은 아닙니다. 은사는 우리에게 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발견할 수 있고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가 없을 때 정밀 진단을 필요로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기독교인으로서 아름답게 형성돼 나타나는 풍성함을 말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갖는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은 충만한 은혜 속에 나타납니다. 허무와 고갈과 무의미함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생한 만남 속에서, 새로 오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먹고 마시는 식탁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체험하여 육적인 생활을 버리고 천국을 향해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 되지는 않지만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扈ⓗ

 

관련자료=영적인 성도, 육적인 성도의 비교1   영적인 성도, 육적인 성도의 비교2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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